공민왕(1330-1374, 충숙왕 17 - 공민왕 23) 고려 31대왕, 본관은 개성, 호는 이재, 익당.
1349년 원나라에서 노국대장공주를 비로 맞이한 2년 뒤, 원나라가 나이 어리고 외척의 전횡으로 국정을 문란하게 한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그의 뒤를 잇게 함으로써, 공주와 함께 귀국하여 왕의에 올랐다.
공민왕과 노국공주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은 후에도 슬퍼하며 그리워했다고 한다)
14c 후반, 원명교체라는 대륙정세의 변동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고려의 중흥을 꾀하여 많은 개혁을 추진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적극적인 배원정책을 펴 몽고적 잔재를 일소하고, 실지회복을 위한 북진정책을 실시하였다. 1351년 고려왕이 된 공민왕은 자신부터 몽골식 머리와 옷을 벗어던지고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개혁에 나섰다. 원의 연호를 폐지하였으며, 정동행성도 폐지한다. 쌍성총관부를 공략하여 실지회복을 위한 북진정책을 실시하였다.
대내적으로는 고려 왕실을 위약하게 한 친원 관문세족을 제거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총 일곱 차례에 걸친 관제개혁을 실시하였다. 권문세족들의 토지 침탈과 부당한 인사행정을 고치려고 하였으며, 소악부를 정리한 익제 이제현과 같은 덕망 있는 학자를 기용했다.
1368년 명나라가 건국되자, 이인임을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에 남아 있는 원나라의 세력을 공략하였으며, 2년 뒤 이성계 장군으로 하여금 동녕부를 치게 하여 오로산성을 점령, 국위를 떨쳤다.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하며 승려인 신돈을 기용하였고, 그는 왕권을 강화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권문세족일파를 숙청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우선, 그동안 인사행정에 폐단이 많았던 정방을 폐지하였다. 정방은 무신 정권 시대 최우가 설치하였던 것으로, 정방에 모여 무신들이 인사권을 장악해 왕권을 약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것을 폐지함으로써 공민왕이 직접 인사권을 가지고 신진 사대부를 기용할 수 있었다.
또한, 정민변정도감이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귀족들이 겸병한 토지를 원래의 소유자인 농민에게 돌려 주게 하고,, 농장으로 들어갔던 백성들도 원래의 양인신분을 회복시켜 주는 등 개혁정치를 베풀었다. 양민들이 많아지게 되면서 세금을 거둘 수 있는 대상이 많아져 국가는 오히려 힘을 얻게 되고 권문 세족들은 토지와 노비가 줄어들어 힘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성균관을 중건하여 신흥사대부들이 진출할 공간을 열어 주었으며, 이로 인해 이색, 정몽주, 정도전, 권근 등 새로운 인물들이 대거 관직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돈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열전'에서 보이며, 신돈 개인이 매우 위선적이었으며, 표면적으로만 고결한 불교 수행자인 것처럼 행동했을뿐, 주색과 사치에 탐닉했었고, 개혁적인 것처럼 보이나, 서민들의 인기를 등에 업고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려는 것에 불과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무엇보다 왕을 미신에 의존하게 했다는 비판을 가하는 입장에서의 해석도 있다.
신돈은 권문세족에게 엄청난 반격이 있었고, 1371년 반역의 혐의로 처형당하였다. 그 후에 최영, 경천흥 등의 무장을 중심으로 한 권문세족이 다시금 권력을 잡게 되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무덤 (현릉과 정릉)
공민왕은 아이를 낳으면서 죽은 노국공주를 너무나 그리워하였다. 노국공주가 죽은 후에는 그의 능에 가서 술을 마시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게다가 '자제위'를 항상 데리고 다녔는데, 술에 취해 한 농을 이해하지 못한 아둔한 자가 공민왕을 시해한 후 도적이 들었다 거짓으로 고하였으나 이인임에 의해 모두 발각되어, 관련된 이들은 모두 처형당하였다.
공민왕의 가야금
공민왕은 뛰어난 화가이기도 하였으며, 직접 연주하는 가야금도 있었다고 한다.
후에, 태조 이성계는 그가 섬겼던 최영 장군을 배신하고 죽였으나, 공민왕을 존경하여 종묘에도 작은 사당을 만들었다.
공민왕의 천산대렵도
1359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다. 홍건적의 난은 규모가 컸으므로, 2차 침공 때에는 개경까지 점령하고 약탈을 저질렀다. 그 시기에 김용의 난까지 일어나 공민왕의 암살위기가 있었다. 공민왕은 멀리 안동까지 피난을 가는 어려움을 겪었으며, 최영 장군과 이성계 장군의 활약으로 소탕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무장세력인 신흥무인세력이 권력을 이향하는데 큰 계기가 되었다.
공민왕의 피난을 조롱하는 백성들의 고려가요가 전해진다.
牛大吼 龍離海 淺水弄淸波 (소가 크게 우니 용은 바다를 떠나 얕은 물에서 물살만 일으키며 노네)
忽有一南寇 深入臥牛峰 (갑자기 남쪽에 난리가 났다 깊이 와우봉으로 들어간다)
소=홍건적이 쳐 들어온 을축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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