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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헌에 관한 기사

눈자라기 2008. 4. 5. 01:43

[21세기와 고전] “사람만큼 자연도 소중하다네”

3. 한국의 전통과 근대 ⑧

홍대용‘의산문답’

김정호 인하대 정치외교학과 교수·한국정치사상 

    • ▲실학자 담헌 홍대용의 초상화.

    의산문답(?山問答)’은 조선 후기 실학자 홍대용(洪大容·1731~1783)의 저작이다. 국가적 생산력의 저하와 명분론적 사고가 만연한 시대상황을 직시하고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려 했던 위대한 개혁사상가의 고뇌가 잘 묻어나 있다.

    의산문답은 ‘실옹(實翁)’과 ‘허자(虛子)’라는 두 가상 인물간의 대화로 구성된다. 실옹은 기존 지식인들의 인식 틀을 뛰어 넘는 새롭고 파격적인 내용을 전개하는 인물로서 홍대용을 상징한다. 허자는 구태의연한 학문적 태도 및 사상만을 고집하던 18세기 중·후반 당시의 보수적 양반지식인층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허자가 실옹의 의견을 듣고 수용하는 태도에서 새로운 것을 깨달아가는 개방적 사상가로서의 홍대용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한다. 실옹과 허자 모두가 홍대용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등장인물이 내포하는 고도의 상징성, 의산문답의 첫 번째 매력이 여기에 있다.

    등장인물과 함께 흥미 있는 것은 공간적 배경이다. 실옹과 허자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곳은 ‘의무려산(-巫閭山)’이다. 의무려산은 중국과 조선의 접경에 위치하고 있는 이름난 산으로 표현되고 있다. 중국과 조선의 경계로서 중국도 아니고 조선도 아닌 의무려산을 공간적 배경으로 설정한 것은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의 사상을 전개하려는 홍대용의 치밀한 의도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치 있는 것은 의산문답의 내용이다. 도입부를 제외하고 제일 먼저 언급되는 것이 인간과 자연계 사물간의 동등성 문제이다. 실옹은 허자의 인간우위의 입장을 비판하면서 인간을 포함하여 자연계 모든 사물은 각기 자신의 삶의 방식에 따라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려 한다는 점에서 차별이 없다고 말한다. 인간이 자연계 사물과 비교해 더 귀하다는 주장은 자기중심적 사고에 불과하며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을 포함한 자연계 모든 사물은 상호 협력하면서 살아가는 동등한 가치를 지닌 존재라고 주장한다. 삶의 방식의 상호 존중과 평화공존의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려는 홍대용의 의식이 잘 나타나는 대목이다.

    다음으로 의산문답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자연과학적 지식과 관련된 내용이다.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각종 천문학적 지식, 인간의 삶과 직결된 자연현상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광범위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 특히 홍대용은 의산문답을 통해 지구설, 지구자전설, 우주무한설 등을 체계화함으로써 기존의 전근대적 자연관에서 벗어나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근대적 자연관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과학적 개혁사상가로서의 홍대용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의산문답의 끝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국가·민족·지역간 관계이다. 홍대용은 실옹의 입을 통해 지구상의 모든 국가·민족·지역이 관점에 따라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으며 각기 자신만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동등하다는 혁신적인 논리를 제시한다. 이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하여 조선의 독자성을 부각시키는 한편 다른 국가·민족·지역으로부터 국가발전에 필요한 부분을 수용하려는 개방적 태도의 소산이다. 또한 당시 조선에 팽배한 한족(漢族)중심 세계관의 모순을 지적하고 청나라의 중국 지배를 시대적 흐름으로 받아들일 것을 역설한 것은 명분론적 대외관계에서 벗어나 국익에 도움이 되는 현실적 대외관계의 필요성을 밝힌 것이다. 시대를 이끌고 앞서간 조선 지식인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고 있다.

     

    의산문답이 주는 현재적 그리고 미래지향적 의미 또한 매우 크다. 인간중심적 사고의 탈피와 자연계 사물과의 공존공영의식, 자연과학적 지식의 지속적 발전을 통한 국가적 생산력의 제고, 민족적 자긍심의 고취와 함께 현실주의적 외교관계 구축의 필요성 등을 읽어 낼 수 있다. 이것이 250여 년 전의 의산문답이 오늘을 살아가고 내일을 준비하는 우리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이유이다.

    [출처] 의산문답-홍대용|작성자 조로

  •  

    <한겨레신문 책과지성 4월14일자 - 의산문답 서평>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 의산문답 - 개혁을 꿈꾼 과학사상가 홍대용의 고뇌
    홍대용 지음. 이숙경·김영호 옮김. 꿈이있는세상 펴냄.

    시대와 불화한 ‘조선의 코페르니쿠스’
    18세기 영·정조 시대 대표적 실학자 홍대용
    지동설·중력설 등 근대 우주론설파하고
    인간중심주의·중화주의 세계관 부정하는
    파격적 행보로 지배계급한테 배척 당해
    절친한 벗 연암만이 ‘당대 최고 인재’ 죽음에 절망

    연암 박지원의 산문 ‘홍덕보 묘지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중국가는 사람을 보내고 난 뒤 나는 (중국)항주사람들이 덕보에게 보낸 서화며 서로 주고받은 편지와 시문이며 이런 것 열 권을 손수 찾아내어 빈소 옆에 벌여 놓고 관을 어루만지며 통곡하였다. 아아! 덕보는 통달하고 명민하고 겸손하고 고아했으며, 식견이 심원하고 아는 것이 정밀하였다. 특히 율력에 정통하여 그가 만든 혼천의 등 여러 기구들은 깊이 생각하고 오래 궁구하여 슬기를 발휘해 제작한 것이었다. 애초 서양인은 땅이 둥글다는 것만 말하고 회전한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덕보는 일찌기 지구가 한 번 돌면 하루가 된다고 논했는데 그 이론이 미묘하고 심오하였다. 그는 미처 이에 관한 책을 쓰지는 못했지만 만년에 이르러 지구가 회전한다는 사실을 더욱 자신하여 의심치 않았다.”(박희병 <연암을 읽는다>)
    덕보는 18세기 조선 영·정조시대 실학자로 북학파의 선두주자 홍대용의 자다. 호는 담헌. 1731년(영조 7년)에 태어나 1783년(정조 7년)만 52살에 세상을 떠났다. 연암(1737-1805)과 동시대인이요 절친한 벗이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연암은 절망하고 비통해했다. 연암이 홍대용의지구 자전설을 언급하면서 “미처 이에 관한 책을 쓰지 못했지만”이라고 한 것은 착오이거나 홍대용의 만년작이자 대표작인 <의산문답>을 읽지 못한 탓으로 보인다. <의산문답>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무릇 땅덩이는 하루에 스스로 한 바퀴를 도는데, 땅 둘레는 9만리이고 하루는 12시간이다. 9만리 넓은둘레의 땅이 12시간에 도는데, 그 속도는 번개나 포탄보다도 더 빠른 셈이다. 땅이 이처럼 빠르게 돌기 때문에 허공의 기가 격하게 부딪치면서 허공에서 쌓여서 땅에 모이게 된다. 이리하여 상하의 세력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지면의 세력 즉, 땅이 끌어당기는 힘이다.”

    9만리는 실제 지구 둘레 약 4만㎞에 근접한 수치이며, 12시간도 자시·축시·인시 등 12지에 근거한 시간개념인 점을 감안하면 지금과 별 차이가 없다. 당시의 과학지식으론 역부족일 수밖에 없어 모호하긴 하지만 중력의 존재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개념은 지구가 그토록 엄청안 속도로 돌아가는데 왜 사람과 만물이 풍비박산하지 않으며 둥근 지구 표면에 붙어 있는 사람들이 왜 떨어져 나가지 않고 달과 별이 아래로 곤두박질하지 않는지 등으로 이어지는 <의산문답> 우주론과 세계인식론에 토대가 된다.그것은 또한 우주무한설과 인간세상 가치들의 덧없음, 지구 및 인간중심주의 부정, 음양오행설 부정, 중화주의 세계관 부정으로도 나아간다.

    코페르니쿠스(1473-1543)가 이미 지동설을 내놨고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던 때가 1616년이었으니, “애초 서양인은 땅이 둥글다는 것만 말하고 회전한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고 한 연암의 인식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에 회부되고 함구령에 처해진 데서도 알 수 있듯 서양 역시 지동설이나 자전설은 매우 위험한 이단이었고 일반인들은 접하기도 어려운 불온사상이었다. 김석문(1658-1735)의 <역학도해>가 이미 덴마크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1546-1601)의 우주관을 싣고 지구가 1년에 366회전한다고 썼는데 담헌이 그것을 읽어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의산문답>은 비록 지구 공전 사실을 모르는 등 한계가 있었지만 자연과학 혁명을 거친 지금 봐도 충분히 통할 수 있는 자연관과 우주론를 펼쳐놓고 있으며, 그것을 토대로 한 세계인식, 사회인식은 시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을 만큼 파격적이며 시대를 훌쩍 앞서 있다.

    ●성리학 부여잡은 기득권 비판

    <의산문답>의 ‘의산’은 조선과 중국의 경계였던 만주 요녕성 북진현 서쪽의 ‘의무려산’을 가리킨다. 담헌은 35살이던 1766년 서장관이었던 숙부 홍억을 따라 연경(베이징)에 가서 60여일간 머물렀는데, 그때의 체험이 이 책의 집필동기가 됐거니와, 의산은 그 여행길에 거치게 되는 곳이고, 책 속의 주인공들인 ‘허자’가 ‘실옹’을 만나러 가서 ‘문답’을 벌인 곳이다. <의산문답>은 그 가공의 인물들이 자연·우주와 세상사에 대해 주고받은 문답집이다. 꿈이있는세상이 펴낸 <의산문답>은 여기에 이 고전 걸작을 오늘의 관점에서 어떻게 읽고 응용할 것인가를 고민한 출판사와 역자들의 문제의식을 강하게 녹여넣은 책이다. E.H. 카의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명제를 모토로 삼은 이들은 <의산문답>이 현재의 우리사회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고 치유를 위한 시사점을 찾는데도 유용하다고 생각한다.원서에는 없는 장·절 구분을 도입하고, 주를 붙이고, 지금 현실의 문제들과 당시를 대비하면서 문제의식을 환기하는 글들도 따로 덧붙였다.

    ●지금의 문제와 대비하며 읽어볼 만

    이들이 보기에 이앙법과 대동법 등이 도입된 18세기 조선사회는 생산력이 폭발적으로 증대됐으나 그 열매는 기득권층이 독식하다시피했으며, 이런 부익부빈익빈의 양극화속에 수많은 난민·기민들이 발생하는 등 기존체제가 그에 따른 변화를 수용할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른 변혁의 시대였음에도 ‘허자’로 대표되는 당시 지배세력은 낡아빠진 기성이데올로기 성리학을 부여잡고 개혁을 완강히 거부했다. 이들은 실학파의 대변인격인 ‘실옹’의 입장에서 오늘날 한국사회가 바로 18세기 조선사회와 닮아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런 점에서 이미 250여년 전에 관과 곽으로 싸고 치장한 장례문화를 비판한 <의산문답>의 대목은 특히 흥미롭다.

    이런 ‘과격한(?)’ 사상의 소유자 담헌이 시대와 불화한 것은 당연했다. 비록 잘나간 조상 덕에 한때 말단 벼슬자리를 맡긴 했지만 그는 당시 지배계급들이 갔던 길을 사실상 거부했고 또한 배척당했다. 연암이 ‘홍덕보 묘지명’에서 “하하 웃고, 덩실덩실 춤추고, 노래하고 환호할 일”이라는 역설로 담헌의 죽음을 슬퍼한 것은 세속명리에 눈이 멀어 동아시아 당대 최고의 인재를 깔아뭉갠 그 시대와 지배계층에 대한 저주였으며, 담헌은 바로 연암 자신이기도 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시대에 던지는 홍대용의 메시지, 『의산문답』


    개혁은 끝이 없다는 홍대용의 외침, 『의산문답!』
    18세기 조선의 실학자이면서 북학파의 선두에 섰던 홍대용은 『의산문답』을 통해 동양 최초로 지동설을 주장하며, 18세기 조선사회의 개혁을 꿈꾸었던 인물이다. 그는 『의산문답』에서 우주와 자연의 이치를 밝히고 세상의 이치를 알려주며, 당시 조선이 어떻게 하면 새로운 변화의 물꼬를 터서 나라와 백성 모두가 잘살 수 있을지를 고뇌한 인물이다. 그가 비록 당시에 뜻을 이룰 수는 없었지만 역사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는 250여 년 전 그가 쓴 『의산문답』을 보며 오늘날 우리 사회에 대해 자문해 보게 된다. 지금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가 무엇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시대를 넘어 지금도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이유는 ‘개혁은 끝이 없다’는 그의 외침은 아닐지 『의산문답』을 통해 들어본다.

    개혁을 요구하는 세상과 끝없이 안주하려는 기득권층!
    『의산문답』은 가상의 인물인 허자와 실옹이 서로 묻고 대답하는 형식의 글로써 허자는 당시의 전통적이고 세속적인 학문에 얽매여 있는 성리학자를 대표하고, 실옹은 청나라와 서구의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인 실학자를 대변하고 있다.
    홍대용이 살았던 18세기 조선은 왜란과 호란을 겪은 지 100년도 훨씬 지났지만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급변하는 시기였다. 농토의 증가와 함께 이앙법의 보급으로 수확량이 늘어났지만 그러한 혜택은 지배계층인 양반과 일부 소수의 자영농에게 대부분 돌아갔기에 농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더욱이 이앙법의 보급은 농업에 있어서 노동력의 감소를 가져와 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야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또한 선조 이후 지방의 특산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대동법과 농민들의 도시 이주로 상업이 발달하였다. 하지만 정부에 특산물을 공급하던 도고의 전매로 인해 물가가 오르는 등 영세한 상인들의 어려움은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정치권은 변화하는 당시 사회의 요구를 뒤로한 채 여전히 정권다툼에 여념이 없었고, 업신여기던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자 성리학으로 더욱 무장하며 명분 없는 중화사상에 빠져있었다. 세상은 변화하고 있는데 당시 개혁의 주체인 기득권층인 양반 지배세력은 주자가 풀어놓은 문구나 외면서 자신들의 이권을 더욱 철저하게 다져나갔다.

    『의산문답』을 통해 개혁을 꿈꾼 홍대용의 6가지 키워드!
    대대로 벼슬을 하며 권력의 핵심이었던 노론의 가문에서 태어난 홍대용! 어려서부터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고학을 하며 자연과학에 심취하였고, 35세에는 서장관이었던 작은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머무르며 서구와 선진문물을 경험한 홍대용! 그는 당시의 조선의 상황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모든 것을 한꺼번에 개혁할 수는 없지만 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 올바른 개혁을 위해서 진정으로 밝히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그는 『의산문답』을 통해 성리학으로 무장한 양반 기득권층의 의식개혁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다양한 자연과학사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요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30년 동안 공부를 하며 성리학으로 무장한 허자가 세상을 나와 실옹을 만났지만 호되게 꾸지람을 받는다. 열심히 공부는 했지만 가식과 위선에 쌓인 허자의 언행은 그야말로 헛됨 그 자체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기득권층인 양반지배세력이 비판과 변화를 수용하지 않는 성리학이라는 낡은 의식에서 벗어나야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홍대용의 개혁의 출발은 바로 낡은 의식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두 번째로, 당시의 성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은 다른 만물보다 더 지혜로운 존재였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엄연한 서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홍대용은 사람과 천지만물은 똑같은 존재라는 인물균(人物均)사상을 내세우며, 기득권층의 우월적인 선택의식과 함께 신분제도가 사라져야 세상이 밝아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로, 지구는 둥글고 지동설을 주장하면서 월식을 보고도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모른다면 거울을 보고도 자기 얼굴을 분간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또한 어디든 자기가 사는 세계가 정중심의 세계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이는 실제 보이는 것도 부정하면 개혁이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으로 자신의 이권을 위해 뻔한 사실도 부정하며 합리화하는 당시의 기득권층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기득권층들이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본 중화사상에서 벗어나야한다는 지적이기도 했다.


    네 번째로, 지구가 우주의 중심도 아니고, 무한한 우주에 한낱 점으로도 표시할 수 없다면서 그런 지구에 사는 인간들이 부질없는 욕심에 빠져 사는 것을 비판했다. 이는 당시 양반 기득권층들이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성리학적 근거를 부정하면서 그들의 끊임없는 욕심과 야욕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또한 천체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면서 천재지변을 음양오행과 연관시켜 자연현상과 인간행위를 연결시킨 재이설을 부정하였는데, 이 또한 헛된 것과 허망한 말로 세상을 기만하지 말라는 진정한 충고이기도 했다.


    다섯 번째로, 자연의 현상을 자세히 설명하고 당시의 장례문화의 헛됨을 지적했다. 이는 자연현상에는 그 법칙이 있듯이 자연스럽게 세상의 이치를 순응하면서 살아갈 때 올바른 변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인데 그렇지 못한 당시 사회상을 비판한 것이었다. 이는 세상과 자연의 이치를 음양과 오행으로 보는 성리학적 입장을 부정하는 것으로써 잘못된 믿음으로부터 벗어나야 개혁할 수 있다는 것으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잘못된 장례문화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여섯 번째로, 중국의 역사와 주변 민족의 다양한 문화를 설명하면서 중국 한족의 문화를 중심으로 보는 화이관을 부정하였다. 이는 당시 기득권층들이 업신여겼던 만주족이 세운 청의 문화는 부정하면서 명나라 멸망 후 명분만 내세우며 중국의 전통 유학을 조선이 이어받았다는 소중화의식에 빠져 있음을 비판한 것이었다. 즉, 중국과 오랑캐의 구분이 없다는 역외춘추론을 주장하며 주체적인 역사의식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주체적인 역사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현실적으로 다양한 문물을 받아들여야 부국강병을 할 수 있다는 홍대용의 간절한 의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시대가 바뀌어도 절실히 요구되는 『의산문답』 사상!
    오늘도 우리는 세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여전히 시끌벅적하다. 황제 골프, 황제 테니스, OO기업 비자금 사건, 한미 FTA, 새만금 간척사업,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과 4조원의 수익, 정규직과 비정규직, 거기에다 대졸 실업자 문제, 사교육비 문제, 재개발 및 판교 청약,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 격차 기타 등등…….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연일 TV와 각종 매체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국제 등 어지러운 우리시대의 단상을 정신없이 내보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그저 조용하기만 하다. 관심을 갖고 싶어도 어쩌면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혼자말로 그저 ‘요즘 젊은 부부들이 왜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하는지 진정 너희가 알기나 알아?’하는 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너희’는 과연 누구인지? 그리고 홍대용의 사상을 통해 그들의 의식개혁이 왜 이렇게 절실히 필요한지 『의산문답』을 보며 해답을 얻으면 어떨까 한다.



    <의산문답 본문 중에서>

    “무릇 짐승과 초목이 아는 것과 깨달음이 없다고 했지만 아는 것이 없는 까닭에 거짓이 없고, 깨달음이 없는 까닭에 몹쓸 짓도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이치로 본다면 만물이 사람보다 훨씬 귀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중략)
    “생각해보아라. 달이 해를 가릴 때에 일식이 되는데, 가려진 모습이 반드시 둥근 것은 달의 모습이 둥글기 때문이다. 또한 땅이 해를 가릴 때에 월식이 되는데, 가려진 모습이 또한 둥근 것은 땅의 모습이 둥글기 때문이다. 그러니 월식은 땅의 거울이라 할 수 있다. 월식을 보고도 땅이 둥글다는 것을 모른다면 이것은 거울로 자기 얼굴을 비추면서도 자기 얼굴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어찌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느냐?” (중략)
    “은나라의 머리에 쓰는 관인 장보章甫나, 주나라의 갓인 위모委貌나, 오랑캐가 몸에 그림을 그리는 문신文身이나, 남만에서 이마에 그림을 그리는 조제雕題는 모두 다 같은 자기들의 습속인 것이다. 하늘에서 본다면 어찌 안과 밖의 구별이 있겠느냐?” (중략)

     

     

    조선 후기 북학파 거두였던 담헌 홍대용도 생태학적 상상력을 유감없이 펼친 ‘탈근대인’이다. 담헌의 ‘의산문답(醫山問答)’ 한 대목이다.

    ‘실옹: 내가 다시 그대에게 묻네. 생물의 종류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사람과 금수(禽獸)와 초목이네. 세 종류의 생물이 서로 어울려 쇠하기도 하고 성하기도 하거늘, 어찌 귀하고 천한 차등이 있겠는가?

    허자: 천지가 낳은 것 중에 오직 사람이 귀하네. 지금 금수와 초목은 지혜도 없고 깨달음도 없으며 예절도 없고 의리도 없으니, 사람이 금수보다 귀하고 초목이 금수보다 천하지 않은가.

    실옹: 그대는 진실로 사람일 뿐일세. 사람의 처지에서 동물을 보면 사람은 귀하고 동물은 천하며 동물의 처지에서 사람을 보면 동물은 귀하고 사람은 천하지만, 하늘로부터 보면 동물과 사람은 균등하고 똑같이 귀하다네.’

    하늘의 처지에서 보면 인간과 자연은 균등하다는 담헌의 ‘인물균(人物均)’ 사상이 ‘실옹’의 입을 통해 드러난다. 인간과 자연 만물은 단절된 관계가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관계를 맺고 있고, 인간만 존귀한 게 아니라 만물이 ‘상대적으로’ 다 가치가 있다는 게 실옹, 즉 홍대용의 견해다. 반면 ‘인간과 자연’을 별개의 존재로 보는 허자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가졌던 데카르트 격인 인물이다.

    실학파였던 담헌이 실옹(實翁)의 이름에 ‘실(實) 자’를, 허자(虛子)의 이름에 ‘허(虛) 자’를 단 까닭을 가늠할 수 있다. 또한 담헌의 ‘인물균’ 사상은 당시 국제정치학적 관점에서도 획기적이었다. 당시 조선 사대부들은 중화(中華)세계만이 중심이고 존귀하다는 소중화주의 세계관에 흠뻑 빠져 있었다. 하지만 담헌은 인물균 사상을 밑거름 삼아 중화세계와 오랑캐(夷)의 차별을 없애고 그 개별적 주체들의 ‘상대적 가치’를 존중하는 ‘탈(脫)소중화주의’ 세계관으로까지 나아간다. 일찍이 ‘지구는 둥글다’고 했던 ‘조선의 갈릴레이’ 홍대용다운 발상이다.

    이 때문에 박희병 교수는 담헌이 조선시대의 중세적 신분관념이나 당시 사대부들의 소중화주의를 벗어날 수 있었던 동력은 바로 생태학적인 ‘인물균’ 사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요즘 식으로 하면 ‘모든 문화에 우월은 없다’면서 개별적 문화의 독자성을 존중하고 ‘주체/객체’를 이분법적으로 분리하지 않는 문화 상대주의자 레비스트로스와 비슷한 아이디어인 셈이다. 인간의 이성을 신화화한 이성중심주의나 서양의 개별성을 주체 중심으로 환원해 ‘나 아닌 타자’를 식민화한 제국주의 사상과는 확연히 다른 공존의 생태철학이 바로 홍대용의 사상인 것이다.

    북학파 리더였던 연암 박지원도 에코필로소피아이긴 마찬가지다. 박희병 교수는 호랑이의 입을 빌려 위선적인 유학자(儒學者)를 풍자했다고 (고등학생들이) 배웠을 소설 ‘호질(虎叱)’은 유학자에 대한 비판을 넘어 ‘인간’과 ‘인간문명’에 대해서도 성찰과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호질’의 호랑이는 인간의 잔혹성과 약탈적 면모를 호되게 질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랑이의 말대로 인간은 그물에서 창·칼·총에 이르기까지 온갖 도구와 장치를 발명해 크고 작은 생물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해치는 잔혹한 동물이다. 이와 달리 호랑이는 초목을 먹지도 않고 벌레나 물고기를 먹지도 않으며, 결코 동류를 잡아먹지 않고 배부르면 사냥을 하지 않는다. 때문에 호랑이의 관점에서는 인간은 “천지간의 큰 도적”일 뿐이고, ‘호질’은 만물일류의 관점에서 인간의 잔인성과 탐욕, 자기중심성을 고발하고 성찰케 한다.

    이렇게 우리의 전통사상 속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은 이나 개나 호랑이나 허자나 실옹이나 모두 똑같이 존귀한 생명체이기 때문에 공존하자는 생태학적 마인드다.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자연관과는 상반된다. 현 단계 인류문명의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적 상상력을 기르는 마인드맵인 것이다.

    논술의 창의력은 참신한 근거를 대느냐, 못 대느냐에 달려 있다. 많은 대학이 창의력 평가에서 ‘참신한 근거의 유무’를 따지는 이유다. 참신한 근거는 어디에서 오는가. 참신한 인용과 생각이다. 생태문제를 논술할 때도 천편일률적으로 서양의 생태학을 논하기보다, 우리의 생태학 전통을 인용하는 것도 참신하다. 문제는 독서를 통해 창의적인 인용 능력을 기르는 게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