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이야기

[스크랩] 잃어버린 역사 가야

눈자라기 2008. 10. 25. 23:03

 

 

 

잃어버린 歷史

 

伽倻佛敎(2)

 

 

 

이 땅에서 491년 간이나 지속됐던 나라.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372년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불교북방전래설'보다 300여년이나 빨리 인도로부터 직접 불교가 전래된 왕국.

그러나 지금은 흔적은 있으나 기록의 부재로 자신의 역사조차 찾지못하고 있는 나라가 있다.

가야가 바로 그 나라이다.

 

가야!

김해시 서상동에는 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능이 자리하고 있다. 1만8천여평에 달하는 지금의 모습은 1963년 이 능이 경남사적으로 지정된 후 줄곧 가꾸어 온 결과이다. 158년간 가야를 통치했으며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이 올것을 미리 예견하고 그녀를 기다려 아내로 맞이한 후 우리나라 최대 성씨인 김해김씨와 김해허씨의 시조가 된 사람 김수로왕.

수로왕릉을 중심으로 이곳 김해 지방에는 삼국유사의 '가야불교인도전래설'을 뒷받침 하는 유적과 사료들이 많이 산재해 있다.

 

이들은 가야불교의 흔적들이면서 동시에 삼국유사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게다가 이곳 김해와 수로왕비인 허왕후의 모국인 인도 아요디아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방년 16세의 나이로 이억만리 머나먼 인도에서 가야땅으로 시집온 허황옥은 140년간 수로왕과 해로하며 10명의 왕자와 2명의 공주를 낳았다고 한다. 그 중 큰아들은 아버지 수로왕의 뒤를 이어 제2대왕인 거등왕이 되어 아버지의 성을 이어 오늘날 600만명에 달하는 김해김씨의 조상이 되었고, 둘째와 셋째는 어머니 허황옥의 성을 잇게해 김해허씨의 조상이 되었다. 이 두문중은 지금도 형제라하여 서로간의 통혼을 삼가고 있다.

 

인도에서 가야로 전래된 가야불교는 지금의 불교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초기 인도불교는 소승불교였고 귀족계급이나 왕족으로 전해지는 귀족불교였다. 따라서 가야불교 역시 소승적 성격이기 때문에 멀리 퍼지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가야의 국력 쇠퇴에 따라 왕실을 중심으로 전해지던 가야불교는 사양길을 걷다가 가야의 멸망과 함께 신라의 대승불교에 흡수 되어갔을 것이다. 그래서 잃어버린 역사 가야불교는 우리에게 너무 먼 거리에 있었다. 시조 김수로왕에서부터 마지막 구형왕까지 490년간 지속된 왕국 가야.

그러나 가야에 대한 기록의 부재는 한 나라의 존재를 머나먼 전설속에 파묻어 두고 있다.

 

역사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역사에게 말을 시키는 사람의 귀에게만 그 비밀을 들려줄 뿐이다.

잃어버린 역사 가야불교는 이제 머지않아 우리의 곁으로 성큼 다가설 것이다.

가야사와 함께 가야불교의 인도전래를 밝히려는 우리의 노력이 계속되는 한 역사는 굳게 닫아 걸었던 침묵의 빗장을 열어줄것이기 때문이다.

 

가야불교의 흔적은 이렇게 남아있는데 역사는 어디로 간 것일까?

(KBS부산 네트워크기획 '지방시대를 연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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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3>
 
허왕후 능 비
 
허왕후 능침 앞에 서 있는 비석에는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 이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보주태후가 문제다.
보주에서 온 왕비라는 뜻인데 그러면 보주는 어디란 말인가?
 
김병모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보주(普州)에 대하여 자세히 연구를 해 봤더니, 보주는 옛날 중국의 한 지명이었다.
중국 후한 때의 역사서인 후한서를 찾아 보았더니 당시 그 땅 이름은 촉 이었는데 그 촉 땅에 살고 있던 토착민들, 즉 남만(南蠻)들이 중앙정부에 대항해서 두 번의 봉기를 일으킨다.
그런데 그 주동자의 이름이 허성(許聖) 이었다.
그러니까 후한 때 보주땅에 허씨 성을 가진 집단이 있었는데,
그들이 첫 봉기를 일으킨 때가 기원후 47년이고
허왕후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때가 기원후 48년 이었다.
정확하게 역사의 톱니가 들어 맞는 것이다."
 
김병모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인도 아요디아가 멸망한 후 그 후예들이 중국 보주 땅으로 건너가는데
그곳에서 기원 후 47년에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그 여파로
기원후 48년에 허왕후 일행이 가야로 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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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4>
 
파사석탑
 
인도 아요디아에서 부친 꿈에 나타난 부처님의 계시에 따라
수로왕의 아내가 되기 위해 찾아온 신부 허황옥.
그녀가 시집온 때의 나이는 16세였다고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전한다.
허황옥은 이곳 김해에서 12형제자매의 어머니이자 국모로서 140년간 살다가 이곳에 묻혀 있다.
그때가 가락국 영제 증평6년, 기원 후 189년인데 당시 허왕후의 나이 157세 였다.
 
허왕후 능 앞에는 '가야불교인도전래설'을 입증하는 귀중한 탑이 하나 있다.
파사석탑(婆娑石塔)!
 
원래 김해 호계사에 있었는데 120년 전에 허왕후가 가져온 탑이라 해서
왕릉 곁에 두었다가 지금의 위치에 놓여 있게된 것이라고 한다.
삼국유사는 이 탑의 유래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공주가 부왕의 명을 받들어 가야로 오고자 했을 때 풍랑이 심하게 일어 항해가 불가능 했다.
공주가 이를 부왕에게 알리자 이 불탑을 줘 파도를 잠재웠다.
그래서 마침내 가야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다."
 
삼국유사 금관성 파사석탑조에 보면 이 탑의 모양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탑은 사방으로 모가나고 5층인데 그 조각이 매우 기이하고 돌에는 조금씩 붉은 반점이 있다.
석질이 부드럽고 특이해서 이 지방에서 구할 수 있는 돌이 아니다"
 
실제로 파사석탑의 모양을 자세히 살펴보면 천년 전 일연스님의 관찰이 정확 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탑은 5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모양이 기이하며 붉은색을 띠고 있다.
그렇다면 이 탑의 재질이 우리나라에서는 나지 않는 파사석으로 되어 있다는 일연스님의 말은 사실일까?
 
향토사학자 허명철 박사의 말을 들어보자.
"본초강목에 의하면 파사석은 불에 태우면 심한 유황 냄새가 나고 또 파사석에 닭벼슬 피를 묻히면 응고되지 않고 물로 화한다고 되어 있는데 직접 실험한 결과 그대로 였다."
 
본초강목은 중국 명나라 때 이시진이 지은 의약서이다.
본초강목의 기록대로 파사석 조각으로 닭벼슬 피를 묻힌 결과 굳어지지 않았는데
이것은 파사석에 칼슘 성분이 많이 들어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런 돌 재질은 우리나라에서는 구할 수 없다고 한다.
천년 전에 이미 이 사실을 안 일연스님의 관찰력이 놀라울 뿐이다.
 
파사석은 인도와 슈마트라가 주산지인 돌로서
인도에 불교가 성립될 당시 불탑의 재료로 쓰였다고 한다.
1978년 가야불교연구회가
인도의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이 돌이 파사석임을 입증하기도 했다 한다.
 
가야불교의 인도전래설에 보다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는 파사석탑!
이 실험 결과는 천년전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의 기록내용이
야사만을 모은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아울러 증명하고 있다.
 
 
 
*삼국유사 기록에는 사방으로 모가나고 그 조각이 매우 귀이하고 했는데
지금의 모습은 유사의 기록과 모양이 많이 다르다. 그것은 파도를 잠재웠다는 전설 때문에
 뱃사람들이 탑돌을 서로 조금씩 떼어가는 바람에 지금의 모양으로 되었다고 한다.
출처 : 賢雲齋 현운재
글쓴이 : 성고운(3)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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