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이야기

[스크랩] 삼국사기 22권 고구려본기 28.보장왕<하><고구려본기 끝>

눈자라기 2008. 10. 25. 23:02

제28대  보장왕<寶藏王(上)  642~668  재위기간 26년>

6년, 당 나라 태종이 다시 원정을 하려 하였다. 조정의 논의가 다음과 같았다.

"고구려는 산에 의지하여 성을 만들었기 때문에 조기에 함락시킬 수 없다. 앞서 왕이직접 원정했을 때, 그 백성들은 농사를 짓지 못했으며, 우리가 정복한 성에서는 곡물들을 수확하였으나, 가뭄이 계속되어 백성의 태반이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다. 이제 만약 적은 군사를 자주 보내, 그 영역을 번갈아 침략하여 그들로 하여금 방어에 지치게 하고, 쟁기를 놓고 싸움터로 나가게 한다면, 수년 내에 천리의 들판은 적막해질 것이며, 민심은 저절로 이반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압록강 이북은 싸우지 않고도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다."

이세민이 이에 따라, 좌무위 대장군 우 진달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 장군 이 해안을 보좌관으로 하여, 군사 1만여 명을 출동시켜, 누선을 타고 내주로부터 해로로 진격케 하고, 또한 태자 첨사 이 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 장군 손 이랑 등을 보좌관으로 하여,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영주 도독부의 군사와 함께 신성에서 진격하게 하였다. 이 두 부대에는 모두 수전에 익숙하고 전투에 능한 자들을 선발하여 배속시켰다. 이 세적의 군사가 요수를 건너 남소 등의 몇 성을 지났는데, 그 성이 모두 성을 등지고 싸웠으므로, 세적이 이들을 격파하고 외성을 불지르고 돌아갔다.

가을 7월, 우 진달·이 해안 등이 우리 국경에 들어와 1백여 차례 싸웠다. 그들은 석성을 격파하고, 적리성 아래까지 진격해왔다. 우리 군사 1만여 명이 나가 싸웠다. 그러나 이 해안이 우리 군사를 공격하여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사망한 우리 군사가 3천명이었다. 태종은 송주 자사 왕 파리 등에게 명령하여, 강남 12주의 공인들을 징발하여, 큰 배 수백 척을 만들어 우리를 공격하려 하였다.

겨울 12월, 왕이 둘째 아들 막리지 임무로 하여금 당 나라에 들어가 사죄하게 하였다. 당태종이 이를 받아들였다.


태종이 조서를 내려 우무위 대장군 설 만철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위 장군 배 행방으로 그를 보좌케 하여 장병 3만여 명과 누선 및 전함을 가지고 내주로부터 바다를 건너 우리를 공격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오호진 장수 고 신감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 공격하였다. 그는 우리의 보병, 기병 5천명과 역산에서 조우하여 우리 군사를 이겼다. 그날 밤, 우리 군사 1만여 명이 신감의 배를 습격하다가 신감의 복병이 출동하여 패배하였다. 태종은 우리가 피폐되었다고 판단하고, 다음 해에 30만 대군을 출동시켜 일거에 멸망시킬 것을 논의에 붙였다. 누군가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말했다.

'대군이 동방으로 원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1년의 군량미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군량을 마소나 수레에 실을 수는 없으니, 마땅히 선박을 준비하여 수로로 운반해야 할 것이다. 수 나라 말기에 검남 지방만은 도적의 침입이 없었고, 지난 번의 요동 정벌 때에도 검남이 참여하지 않았으니, 그곳의 부유한 백성들로 하여금 선박을 만들게 해야할 것이다.'

태종이 이 말을 따랐다.

가을 7월, 서울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몸뚱이는 하나이고 머리가 둘이었다.

태종이 좌령 좌우부 장사 강 위를 검남도에 파견하여, 나무를 베어 선박을 만들게 하였다. 큰 배 중에는, 길이가 1백 척, 넓이가 오십 척이 되는 것이 있었다. 이 배들은 따로 사신을 파견하여 수로를 통하여 무협에서 강남과 양주를 거쳐 내주로 가게 하였다.

9월, 노루가 떼를 지어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고, 이리도 떼를 지어 사흘 동안 서쪽으로 갔다.

태종이 장군 설 만철 등으로 하여금 우리 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서, 박작성 남쪽 40리 지점에 진을 쳤다. 박작 성주 소부손이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방어하였다. 만철이 우위 장군 배 행방으로 하여금 보병과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이들을 공격케 하자 우리 군사가 무너졌다. 배 행방 등이 진격하여 포위하였으나, 박작성은 산을 이용한 험준한 요새였으며, 압록강으로 튼튼하게 막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우리 장수 고 문이 오골성·안지성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두 진으로 나누어 구원하였다. 만철이 군사를 나누어 이에 대응하여,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태종이 또한 내주 자사 이 도유에게, 군량과 기계를 운반하여 오호도에 비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장차 대정벌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8년 여름 4월, 당 나라 태종이 사망하였다. 태종은 조칙을 내려 요동 정벌을 중지하게 하였다.

저자의 견해 : 처음에 태종이 요동 원정을 할 때, 이를 말리는 자가 한 사람 뿐이 아니었다. 또한 안시성으로부터 군사를 철수한 뒤에는, 자기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고 한탄하며, "만약 위 징이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원정을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다시 고구려를 치려 할 때 사공 방 현령이 병중에 있으면서도 표문을 올려 다음과 같이 간했다.

"노자는 '만족함을 알면 욕을 당하지 않으며,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폐하의 위대한 명성과 공덕은 이미 만족할만 하며, 국토를 넓히는 일도 역시 멈출만한 정도가 되었습니다. 폐하께서는 한 명의 중죄인을 처형할 때도 언제나 필히 세 번 심사하고 다섯 번 변명할 기회를 주었으며, 검소한 식사를 올리게 하고, 풍류를 중지하게 하였으니, 이는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일 터인데, 이제 무죄한 사졸들을 몰아다가 칼날 밑에 맡겨 참혹히 죽게 하는 것만은 왜 불쌍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지난날, 고구려가 신하의 절차를 어겼다면 벌주는 것이 옳으며, 우리 백성들을 침략하였다면 없애버리는 것이 옳으며, 후일 중국의 걱정거리가 된다면 제거하여 버리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와 같은 세 가지 조건이 하나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데, 공연히 중국 자신을 괴롭히면서, 안으로는 선대의 치욕을 씻고, 밖으로는 신라의 복수를 한다하니, 이야말로 어찌 얻는 것은 작고 잃는 것은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원컨대 폐하는 고구려가 스스로 새로 태어나도록 허락하시어, 창파에 띄운 선박을 불태우고, 징발해온 군사들을 돌려 보내십시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중국에는 경사가 깃들고, 오랑캐들은 우리를 믿을 것이며, 먼 곳은 조용하고 가까운 곳은 평안해질 것입니다."

양공이 죽음을 앞두고 한 말이 이와 같이 간곡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동방을 폐허로 만드는 것을 자기 만족으로 삼으려다가 죽은 뒤에야 그만 두었다. 사론에서 말하는 바 "큰 것을 즐기고, 공명을 좋아하여, 먼 곳으로 군사를 내몰았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유 공권의 소설에서는 "주필산 전쟁에서 고구려가 말갈과 군사를 연합하니, 그 군사가 바야흐로 40리나 뻗쳤다. 태종이 이를 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또한 "황제의 6군이 고구려 군사에게 제압되어 거의 꼼작 못하였네. 영공의 휘하에 있는 검은 깃발이 포위되었다고 척후병이 보고하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 하였네."라고 하였다. 비록 나중에 몸은 탈출했으나 그와 같이 겁을 내었는데, [신구당서]와 사마광의 [통감]에 이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나라의 체면 때문에 말하기를 기피한 것이 아니겠는가?


9년 여름 6월, 반룡사의 보덕 화상은, 나라에서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믿지 않는다 하여, 남쪽에 있는 완산 고대산으로 옮겨 갔다.

가을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에 해가 미치고, 백성들이 굶주렸다.


13년 여름 4월, 어떤 사람이 말했다.

"마령에서 신령스런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너의 임금과 신하들이 사치스럽기 한이 없으니 패망할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장수 안고로 하여금 말갈군과 함께 거란을 공격하게 하였다. 송막 도독 이 굴가가 대항하여 신성에서 우리 군사를 대패시켰다.


14년 봄 정월, 이보다 앞서 우리가 백제·말갈과 더불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33개 성을 점령하였는데, 신라왕 김 춘추가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2월, 당 나라 고종이 영주 도독 정 명진과 좌위 중랑장 소 정방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다.

여름 5월, 명진 등이 요수를 건너 오자, 우리 군사는 상대방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성문을 열고 귀단수를 건너가 전투를 벌였다. 명진 등은 우리를 맹공하여 크게 이기고, 우리 군사 1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으며, 우리의 외성과 촌락에 불을 지르고 돌아갔다.


15년 여름 5월, 서울에 쇳가루가 비처럼 떨어졌다.



17년 여름 6월, 당 나라 영주 도독 겸 동이 도호 정 명진과 우령군 중랑장 설 인귀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를 공격하였으나 이길 수 없었다.


18년 가을 9월, 호랑이 아홉 마리가 한꺼번에 성안으로 들어와서 사람을 잡아 먹었으나, 이들을 잡지 못했다.

겨울 11월, 당 나라 우령군 중랑장 설 인귀 등이 우리 장수 온 사문과 횡산에서 싸워 우리 군사를 패배시켰다.


19년 가을 7월, 평양의 강물이 3일 동안 핏빛으로 변했다.

겨울 11월, 당 나라에서 좌효위 대장군 설필 하력을 패강도행군대총관, 좌무위 대장군 소 정방을 요동도행군대총관, 좌효위 장군 유 백영을 평양도행군대총관, 포주 자사 정 명진을 누방도총관으로 삼아 각각 다른 길로 군사를 이끌고 와서 우리를 공격했다.


20년 봄 정월, 당 나라가 하남·하북·회남 등의 67개 주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4만 4천여 명을 평양과 누방 군영으로 가게 하고, 또한 홍려경 소 사업을 부여도행군총관으로 삼아, 회흘 등 제 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진군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임 아상을 패강도행군총관, 설필 하력을 요동도행군총관, 소 정방을 평양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소 사업과 모든 오랑캐 군사 35군을 거느리고 수륙으로 길을 나누어 동시에 진군하였다. 이 때 당고종이 직접 대군을 통솔하려 하였다. 울주 자사 이 군구가 말했다.

"고구려는 소국인데, 어찌 중국의 모든 국력을 기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만약 고구려가 망한다면 우리가 반드시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지켜 주어야 합니다. 이 때 군사를 적게 출동시키면 위신이 서지 않을 것이오, 많이 출동시킨다면 백성들이 평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온 나라 사람들을 전쟁으로 내몰아 피곤하게 하는 것입니다. 토벌하는 것이 토벌하지 않는 것만 못하며, 멸망시키는 것이 멸망시키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에 또한 무후도 말렸으므로 당고종이 중지하였다.

여름 5월, 왕이 장군 뇌 음신으로 하여금 말갈군을 거느리고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하였다. 열흘이 되도록 포위를 풀지 않았다. 신라의 군량 수송이 차단되어 성안에서는 위험과 공포를 느꼈다. 갑자기 큰 별이 우리의 병영에 떨어지고 우레가 치며 비가 오고 벼락이 쳤다. 뇌 음신 등은 의심스럽고 놀라서 퇴각하였다.

가을 8월, 소 정방이 패강에서 우리 군사를 격파하여 마읍산을 탈취하고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9월, 개소문이 그의 아들 남생에게 정병 수만 명을 주어 압록강을 수비케 하였다. 당 나라의 모든 부대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설필 하력이 압록강에 도착하였을 때는 강에 얼음이 얼었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얼음 위로 강을 건너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지르며 공격해왔다. 우리 군사가 패주하였다. 하력이 수십 리를 추격하며 우리 군사 3만명을 죽였다. 남은 군사는 모두 항복하였고, 남생은 간신히 자기 몸만 피하여 달아났다. 이즈음, 당 나라에서 군사를 철수하라는 조서가 있었으므로 그들은 곧 돌아갔다.


21년 봄 정월, 좌효위 장군 백주 자사 옥저도총관 방 효태가 개소문과 사수 언덕에서 싸우다가 그의 군사가 전멸하였다. 효태도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소 정방은 평양을 포위했다. 그 때 마침 폭설이 내렸으므로 그들은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이리하여 당 나라는 전후의 정벌에서 매번 큰 성과없이 물러갔다.


25년, 왕이 태자 복남[[신당서]에는 남복이라 하였다.]을 당 나라에 파견하여 황제가 지내는 태산의 봉선에 참가케 하였다.

개소문이 죽고 그의 맏아들 남생이 부친을 대신하여 막리지가 되었다. 처음 정사를 맡아 여러 성을 순행하면서, 그의 두 아우 남건과 남산으로 하여금 조정에 남아 뒷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어떤 자가 두 아우에게 말했다.

"남생은 두 아우가 자기의 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 하여, 당신들을 처치하려 합니다. 먼저 계책을 세워 도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두 아우가 처음에는 이를 믿지 않았다. 어떤 자가 남생에게 또 말했다.

"두 아우가, 형이 돌아오면 자기들의 권세를 빼앗을까 두려워 하여 형에게 대항하여 조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

남생은 남몰래 자기의 심복을 평양으로 보내, 두 아우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두 아우가 이를 알고 남생의 심복을 체포하고, 곧 왕명으로 남생을 소환하였다. 남생은 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남건은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출동시켜 남생을 토벌하였다. 남생이 국내성으로 도주하여 그곳에 웅거하면서, 그의 아들 헌성을 당 나라에 보내 구해줄 것을 애원하였다.

6월, 고종이 좌효위 대장군 설필 하력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맞이하게 하였다. 남생은 탈출하여 당 나라로 도주하였다.

가을 8월, 왕이 남건을 막리지로 삼아 내외의 군사에 대한 직무를 겸직하도록 하였다.

9월, 고종이 남생에게 조서를 내려, 요동 도독 겸 평양도 안무 대사로 특진시키고, 현토군공으로 책봉하였다.

겨울 12월, 고종이 이 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 겸 안무 대사로 삼고, 사열소상 백 안육과 학 처준으로 하여금 이들을 보좌케 하며, 방 동선과 설필 하력을 요동도행군부대총관 겸 안무 대사로 삼고, 기타 수륙군 모든 부대의 총관들과 전량사인 두 의적·독고 경운·곽 대봉 등은 모두 이 적의 지휘를 받게 하고, 하북 여러 주의 조세는 모두 요동으로 보내 군사용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26년 가을 9월, 이 적이 신성을 함락시키고, 설필 하력으로 하여금 그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이 적이 처음에 요수를 건너올 때 모든 장수들에게 말했다.

"신성은 고구려 서쪽 변경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이곳을 먼저 얻지 않으면 다른 성을 쉽게 빼앗을 수 없다."

그는 드디어 신성을 공격하였다. 신성 사람 사부구 등이 성주를 결박하여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였다. 이 적이 군사를 이끌고 계속 진격하자 16개 성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 때 방 동선과 고 간이 아직 신성에 있었으므로, 천 남건이 군사를 보내 그들의 병영을 습격하였다. 좌무위 장군 설 인귀가 우리 군사를 격파하였다. 고 간이 금산으로 나와서 우리 군사와 싸워 패배하였다. 우리 군사는 승세를 타고 패배한 군사를 추격하였다. 설 인귀가 군사를 이끌고 측면을 공격하여 우리 군사 5만여 명을 죽이고, 남소·목저·창암 등 3성을 함락시킨 후, 천 남생의 군사와 합세하였다.

곽 대봉은 수군을 이끌고 다른 길을 통하여 평양으로 왔다. 이 적은 별장 풍사본을 파견하여 곽 대봉에게 군량과 병기를 공급케 하였는데, 사본의 배가 파괴되어 약속 기일을 놓쳤으므로 대봉의 진영에서 군사들이 굶주렸다. 이에 따라 그가 이 적에게 편지를 보내려다가, 만일의 경우 적에게 발견되어 내부의 허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이합시를 지어서 이 적에게 보냈다. 이 적이 이를 보고 노하여 말하기를 "군사의 일이 바야흐로 위급한데 시가 도대체 무엇인가? 필히 목을 베겠다."라고 하였다. 행군 관기 통사 사인 원 만경이 그 시의 뜻을 해석하여 주었다. 이 적은 그 때서야 다시 군량과 병기를 대봉에게 보냈다. 만경이 격문을 써서 말하기를 "압록의 요충지를 지킬 줄 모르는가?"라고 하였다. 천 남건이 회보하기를 "삼가 명령을 듣겠다"라 하고, 즉시 군사를 옮겨 압록강 나루에 진을 쳤다. 이에 따라 당 나라 군사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만경을 영남으로 유배하였다. 학 처준은 안시성 아래에 있었다. 그가 아직 군사 대열을 짓지 못하였을 때, 우리 군사 3만 명이 엄습하니 그 군사들이 크게 당황하였다. 처준이 의자에 앉아서 한참 마른 밥을 먹다가, 정예 군사를 선발하여 우리 군사를 격파하였다.


27년 봄 정월, 당 나라 고종은 우상 유 인궤를 요동도부대총관으로 삼고, 학 처준과 김 인문 등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하게 하였다.

2월, 이 적 등이 우리 부여성을 점령하였다.

설 인귀는 이미 금산에서 우리 군사를 격파하여, 승세를 타고 군사 3천 명을 이끌어 부여성을 치려 하였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이 자기 편 군사가 적다고 하며 이를 중지하기를 권하였다. 인귀가 말했다.

"병력은 반드시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어떻게 쓰는가에 달린 것이다."

그는 마침내 스스로 선봉이 되어 우리 군사와 싸워 이기고, 우리 군사를 죽이고 사로잡았다. 그가 또한 부여성을 점령하자, 부여천 안에 있는 40여 성이 모두 항복하기를 요청하였다. 시어사 이 언충이 임무를 받들고 요동에서 귀국하였다. 고종은 "군대 내부 상황이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이전에 선제께서 고구려에 죄를 물었을 때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은, 적에게 빈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군대에도 중매잡이가 없으면 중도에 돌아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남생이 형제끼리 싸워 우리의 향도가 됨으로써, 적의 내부 상황을 우리가 모두 알고 있으며, 또한 장수들은 충성스럽고 군사들은 힘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비기]에는 '9백년이 되기 전에 80대장이 있어 고구려를 멸망시킨다'라는 말이 있는데, 고씨가 한 나라 때 나라를 세워 지금 9백 년이 되었고, 이 적의 나이가 80입니다. 적들은 거듭 흉년이 들고, 백성들은 항상 수탈을 당하고 팔려갔으며,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고, 이리와 여우가 성에 들어오고, 두더지가 문에 구멍을 뚫으며, 인심이 흉흉하니, 이번 원정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천 남건이 부여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다시 군사 5만 명을 보냈는데, 설하수에서 이 적 등과 조우하여 싸우다가 패하여 사망자가 3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 적은 대행성으로 진격하였다.

여름 4월, 혜성이 필성과 묘성 사이에 나타났다. 당 나라 허 경종이 "혜성이 동북방에 보이는 것은 고구려가 장차 멸망할 징조이다"라고 말하였다.

가을 9월, 이 적이 평양을 점령하였다. 이 적이 이미 대행성에서 승리하자, 다른 도로 출동하였던 제군이 모두 이 적과 만나 압록책으로 진군하여 왔다. 우리 군사가 대적하여 싸우다가 이 적 등에게 패배하였고, 이 적 등은 2백여 리를 추격해와서 욕이성을 함락시켰다. 여러 성에서 도망하고 항복하는 자가 연이었다. 설필 하력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밖에 도착하고, 이 적의 군사가 뒤따라 와서 한 달이 넘도록 평양을 포위하였다.

보장왕 장이 천 남산으로 하여금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백기를 들고 이 적에게 항복하게 하였다. 이 적은 예를 갖추어 접대하였다. 그러나 천 남건은 오히려 성문을 닫고 수비하며 대항하였다. 그는 자주 군사를 출동시켜 싸웠으나 그때마다 패배하였다. 남건은 승려 신성에게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신성은 소장 오사·요묘 등과 함께 이 적에게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내응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5일 뒤에 신성이 성문을 열었다. 이 적은 군사를 풀어 성위에 올라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불을 지르게 하였다. 남건은 스스로 칼을 들어 자신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당 나라 군사가 왕과 남건 등을 붙잡았다.

겨울 10월, 이 적이 귀국하려 하자, 고종이 그에게 먼저 고구려의 왕 등을 소릉에 인사시킨 후, 군용을 갖추어 개선가를 부르며 서울로 들어와 다시 태묘에 인사시키도록 명령하였다.

12월, 고종이 함원전에서 포로를 전해 받았다. 고구려왕은 정치를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하여 죄를 용서하여 사평태상백원외동정으로 삼았다. 그리고 천 남산은 사재 소경, 승려 신성은 은청 광록대부, 천 남생은 우위 대장군으로 삼았다. 이 적 이하 여러 사람들에게는 벼슬과 상을 정도에 따라 주었다. 천 남건은 검주로 유배시켰다. 고구려 지역의 5부, 1백76성, 69만여 호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백 현으로 만들고,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여 이들을 통치하게 하였다. 우리 장수들 중에서 공로가 있는 자들을 발탁하여 도독·자사·현령으로 삼아, 중국인들과 함께 정치에 참여하게 하였다. 우위위 대장군 설 인귀를 검교안동도호를 삼아,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이 지역을 진무케 하였다. 이 때가 고종 총장 원년 무진년이었다.

2년 기사 2월, 왕의 서자 안승이 4천여 호를 인솔하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여름 4월, 고종이 3만 8천3백 호를 강·회의 남쪽과 산남·경서 등지에 있는 모든 주의 빈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함형 원년 경오 여름 4월, 검모잠이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당 나라를 배반하고, 왕의 외손 안순[[신라본기]에는 승으로 되어있다.]을 임금으로 세웠다. 당 고종이 대장군 고 간을 동주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이를 토벌케 하였다. 안순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주하였다.

2년 신미 가을 7월, 고 간이 안시성에서 우리의 남은 군사를 격파하였다.

3년 임신 12월, 고 간이 우리의 남은 군사와 백빙산에서 싸워 우리 군사를 격파하니, 신라에서 군사를 보내 우리를 구원하였다. 그러나 고 간이 이를 다시 격파하여 2천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갔다.

4년 계유 여름 윤 5월, 연산도총관대장군 이 근행이 호로하에서 우리 군사를 격파하고 수천 명을 사로잡았다. 남은 군사들은 모두 신라로 도주하였다.

의봉 2년 정축 봄 2월, 항복한 고구려의 보장왕을 요동주 도독으로 삼고 조선왕으로 봉하였다. 그리고 그를 요동으로 돌려 보내 남은 백성들을 수습하여 안정시키게 하였다. 이 때, 동방 사람으로서 이전부터 여러 주에 살고있던 자들을 모두 왕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안동 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 통할하게 하였다. 왕은 요동에 도착하여 당 나라에 대항하고자 비밀리에 말갈과 내통하였다.

개요 원년, 왕이 앙주로 소환되었다가 영순 초에 붕어하였다. 고종이 그에게 위위경을 추증하고, 조서를 내려 영구를 서울로 오게 하여 힐리의 무덤 왼편에 장례를 지냈다. 묘 앞에 비를 세웠다. 그 백성은 하남·농우의 여러 주에 분산 거주케 하였다. 그 가운데 가난한 자들은 안동성 부근의 옛성에 머무르게 하였다. 그러나 일부는 신라로 도주하고, 남은 사람들은 흩어져 말갈과 돌궐로 갔다.

마침내 고씨의 왕통이 끊어졌다.

수공 2년, 항복한 왕의 손자 보원을 조선군왕으로 삼았다가, 성력 초에 좌응양위 대장군으로 승진시키고, 다시 충성국왕으로 봉하여 안동의 구부를 주어 통치하게 하였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이듬해에, 항복한 왕의 아들 덕무를 안동 도독으로 삼았는데, 후에 조금씩 스스로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원화 13년에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악공을 바쳤다.

저자의 견해 : 현토와 낙랑은 원래 조선의 국토로서 기자가 봉해졌던 곳이다. 기자는 백성들에게 예의와 농사와 누에치기와 베 짜는 법을 가르치고, 8조의 금법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이곳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고, 대문을 닫지 않고, 부녀들이 정조와 신의를 지켜 음란하지 않고, 음식을 먹을 때 그릇을 사용하였다. 이는 어질고 현명한 사람의 교화가 미친 탓이었다. 또한 그들은 서·남·북방의 오랑캐들과는 달리 천성이 유순하였다. 이리하여 공자는 자기의 도가 중국에서 행하여지지 않음을 슬퍼하고, 바다에 배를 띄워 이곳에 살고자 하였으니, 이 또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역의 괘가 효이(爻二)를 다예(多譽), 효사(爻四)를 다구(多懼)라 한 것은 군위(君位)에 가깝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진·한 이후로 중국의 동북방의 한 쪽에 끼어 있었다. 북쪽 인근 지역들은 모두 천자가 관리를 보내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혼란한 시기에는 영웅들이 나타나 참람되게도 황제의 이름과 지위를 차지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실로 다구(多懼)의 지역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는 겸양하려는 생각없이, 천자의 영역을 침노하여 원수를 맺었으며, 천자의 군현에 들어가 살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전쟁이 계속되고 화근이 맺어졌으므로 평안한 해가 거의 없었다.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때는 수·당이 중국의 통일을 이루었던 시기에 해당한다. 이 때 고구려는 오히려 불손하게도 중국의 조서와 명령을 거역했으며, 천자의 사신을 토방에 가두기도 하였다. 고구려는 이와 같이 고집스럽고 겁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번이나 죄를 묻는 정벌의 군사를 부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록 어떤 시기에는 기묘한 계책으로 대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던 적도 있었으나, 결국은 왕이 항복하고 나라가 멸망하였다. 고구려 전체의 역사를 살펴보면, 임금과 신하가 화평하고 백성들이 서로 화목했을 때는, 비록 대국이라 할지라도 고구려를 빼앗지 못하였지만, 나라에 정의가 사라지고, 군주가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아 그들의 원성이 일어난 뒤에는, 나라가 붕괴되어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맹자는 "전쟁의 승리에 있어서, 시기의 이로움과 지형의 이로움이 인심의 화목함만 못하다."라고 말했으며, 좌씨는 "국가는 복으로 흥하고 화로 망한다. 나라가 흥하려면, 군주가 자기 몸에 난 상처를 보듯이 백성을 보살펴야 하나니, 이것이 복이다. 나라가 망하려면 백성을 흙먼지 같이 여기나니 이것이 화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무릇 나라를 맡은 군주들이 횡포한 관리들을 풀어놓아 백성을 구박하게 하며, 권문세가들로 하여금 가혹한 수탈을 일삼게 하여 인심을 잃게 되면, 비록 정치를 잘하여 혼란을 제거하고, 나라를 유지하여 망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할지라도, 이것이 또한 억지로 술을 권하면서도 취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출처 : 賢雲齋 현운재
글쓴이 : 성고운(3)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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