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이야기

[스크랩] 보장봉노 보덕이암

눈자라기 2008. 10. 25. 23:01

보장봉노 보덕이암(보장왕이 도교를 신봉하자 보덕화상이 절을 옮김)

 

     고구려 본기에 이런 말이 있다. 고구려 말기인 무덕 정관 연간에 나라 사람들이 다투어 오두미교(후한 때 발흥한 종교, 삼국지에 나오지요)를 신봉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당나라 고조가 도사를 시켜 천존상(도교에서 모시는 최고의 신)을 보내고, 또 가 서 도덕경을 강술케 하여 왕이 백성들과 함께 그것을 들었다. 때는 곧 제 27대 영류왕 즉위 7년, 무덕 7년 갑신(624)이었다. 이듬해 고구려에서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불교와 도교를 배우기를 청하자, 당나라 황제는 이를 허락했다.


     그 뒤에  보장왕이 즉위하자-정관 16년 임인(642)- 또한 유불도의 세교를 같이 일으키려 했다. 그 때 왕의 총애를 받던 재상 개소문이 왕에게 말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다같이 성하게 일어나지만 황관(도사)은 성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특별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도록 하십시오." 그 때 반룡사에 있던 보덕화상이 도교가 불교와 맞서면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 질 것을 염려하였다. 이에 여러번 왕에게 간했으나 왕은 듣지 않으므로 신력으로 방장 을 날려 남쪽에 있는 완산주-전주- 고대산으로 옮겨 살았으니 바로 영휘 원년 경술 (650) 6월 이었다. 또 본전에는 건봉 2년 정묘(667) 3월 3일의 일이라 했다. 총장 원 년 무진(668)에 나라가 망했으니 셈해 보면 19년 후가 된다. 지금의 경복사에 날아온  방장이 있다는데 바로 이것이라 한다. 진락공(고려 이자현의 시호)은 그를 위해 시를 써서 당(堂)에 남겨두었고, 문열공(김부식의 시호)은 그의 전기를 저술하여 세상에 전 했다.


     또 당서를 살펴보면 이보다 앞에 수나라 양제가 요동을 정벌할 때 비장 양명이란 자가 있어서 전쟁에서 불리하여 바야흐로 죽게 되자 맹세하기를 "내 반드시 고구려의 총신이 되어 저 나라를 멸망시키고야 말 것이다." 개(蓋)씨가 정권을 잡고 독재하자 개로 성을 삼으니 곧 양명이 이에 부합된다.


     또 고구려 고기에 이렇게 말했다. 수나라 양제가 대업 8년 임신(612)에 30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처들어 오매, 10년 갑술 (614)10월에 고려왕-영양왕-이 표문을 올려 항복을 청했다. 이 때 한 사람이 비밀리에 소노(小弩)를 품속에 감추고 표문을 가진 신을 따라 양제가 탄 배안으로 들어갔다. 양제가 표문을 들어서 읽고 있 는데 소노를 쏘아 양제의 가슴을 맞혔다. 이에 양제가 즉시 군사를 돌리려 하여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천하의 군주가 된 내가 이 조그만 나라를 친정하여 이기지 못했으니 만대에 웃 음거리가 되었도다."


     이때 우상 양면이 아뢰었다.


     "신이 죽으면 고구려 대신이 되어 필연코 그 나라를 멸망시켜 제왕의 원수를 갚 겠사옵니다."


     그 후 양제가 죽은 뒤 그는 과연 고구려에 태어났다. 나이 15세가 되니 총명하였 으며 신기한 무용이 있었다. 그때 무양왕-확실하지는 않다.-이 그의 어질다는 말을 듣 고 불러 신하로  삼았다. 그는 스스로 성을 개(盖)라 하고 이름을 금(金)이라 하였다.
지위는 소문에까지 이르렀다. 소문은 바로 시중의 벼슬이다.


     개금이 아뢰었다.


     "솥에는 세 개의 발이 있고, 나라에는 세 가지 교가 있는 법이다. 신이 보건대  이 나라에는 불교와 유교만 있고, 도교가 없으므로 나라가 위태로운 것입니다." 왕은 이를 옳게 여겨 당나라에 도교를 청했다. 이에 태종이 서달 등 도사 8명을 보내주었다.


     왕은 기뻐하여 절을 도관으로 만들고 도사를 존경하여 유사(儒士)위에 앉게했다.
도사들은 나라 아의 이름난 산천을 돌아다니며 이를 진압시키는데, 평양성의 지세가  신월성(半月城)이라 하여 도사들은 주문을 외워 남하의 용에게 명령해서 만월성을 더 늘려 쌓아 용언성이라 했으며, 참기(讖記-앞날의 길흉에 대해 적은 글)를 지어 용언도 또는 천년보장도라고 했다. 여기에 혹 영석을 파서 깨뜨리기도했다.


     개금은 또 왕에게 아뢰어 동북쪽과 서남쪽에 긴 성을 쌓게 했다. 이 역사는 16년 만에야 끝났는데, 이 기간 동안 남자들은 부역에 나가고 여자들이 농사를 지었다. 보 장왕 때에 이르니 친히 6군을 거느린 당나라 태종이 쳐들어 왔지만 또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당나라 고종 총장 원년 무진(668)에 우상 유인궤, 대장군 이적과 신라 김인 문 등이 고구려를 쳐서 나라를 멸망시켜 왕을 사로잡아서 돌아갔다. 이에 보장왕의 서 자(안승)가 4천여가(家)를 인솔하여 신라에 항복했다. 대안 8년 신미(1092)에 고려의 우세승통(대각국사 의천)잉 고대산 경복사의 비래방장에 가서 보덕성사의 영정을 뵙고 시를 지었다.

 

                열반의 평등한 가르침
                우리의 스승들로부터 전해졌다고 이르네.
                애석해라 승방을 날려온 후, 동명왕의 고국이 위태로웠네.

 

     그 발문에는 이런 말이 있다.


     "고구려 보장왕이 도교에 미혹하여 불교를 믿지 않으므로 이에 보덕법사는 승방 을 날려서 남쪽의 마이산으로 옮겨 놓았다."


     그 후에 신인이 고구려 마령에 나타나 사람들에게 말했다. <너희 나라가 망할 날 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런 것은 모두 국사와 같고 그 나머지는 모두 본전과 승전에 적혀 있다. 보덕법 사에게는 11명의 덕이 높은 제자가 있었다. 그 중 무상화상은 제자 김취등과 함께 금 동사를 세웠고, 적멸, 의융 두 법사는 진구사를 세웠으며, 지수는 대승사를 세웠고, 일승은 심정,대원 등과 함께 대원사를 세웠고, 수정은 유마사를 세웠으며, 사대는 계 육 등과 함께 중대사를 세웠고, 개원화상은 개원사를 세웠고, 명덕은 연구사를 세웠다.
개심과 보명도 역시 전기가 있는데 모두 본전과 같다.


     기리어 읊는다.

 

                불교는 드넓은 바다처럼 끝이 없어라.
                백천의 유도교 다 받아들이네
                가소롭다. 저 여왕(麗王) 웅덩이를 막으니

                와룡(초야의 큰인물)이 바다로 옮겨감을 알지 못하네

출처 : 賢雲齋 현운재
글쓴이 : 성고운(3)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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