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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광한루와 풍수

눈자라기 2008. 10. 25. 22:31

 

 

광한루(廣寒樓)의 누(樓)란 사방을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자연과 어우러져 쉴 수 있도록 경치 좋은 곳에 지은 건물을 말합니다.
원래 조선 세종때인 1419년 황희 정승이 건립, 광통루라 하였으나

1444년 관찰사 정인지가 그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의 아름다움이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月宮) 속에 있는 "광한청허부"와 같다고

광한루라는 이름이 유래됐다고 합니다.

 

 

<남원 광한루의 석오>

 

큰 자라돌이 삼신산(영주섬, 봉래섬, 방장섬)을 바라보고있다.

이 자라돌은 길이 2.4m, 폭1.2m, 높이1.2m로  도(道)를 뜻하지 않은가?

 광한루의 영주, 봉래, 방장 등 삼신산이 조성될 때 만들어졌다고하며,
 머리는 멀리 지리산과 견두산(수지면 고평리 소재)을 향하고 있으며,
 이곳에 자라돌의 위치를 정한 까닭과
자라돌을 두게된 연유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남원지]의 기록에는 석오를 자라로 보느냐 거북으로 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다른 두 가지의 전설이 전해온다고 되어 있다.

그 하나는 광한루원이 우주를 상징하는 정원으로 꾸민 신선(神仙)사상에 연유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원의 풍수지리와 연관된 것이다.
전자의 연유를 살펴보면 "삼신산(三神山)과 삼선산(三仙山)이라고 하는데
 하늘의 태을(太乙)이 내려와 노니는 곳이라 한다.


이 삼신산은 동해에 사는 어마어마하게 큰 자라가 등에 업고 있다는 신선사상의 이상적인
전설에 따라 광한루에 삼신산을 만들었으니 이 삼신산을 업고 있는 것이 자라돌이다.


또 다른 전설은 이 석오를 자라가 아닌 거북으로 보는 것인데. "지리산은 남원에서 바라보면
동남방에 위치한 셈인데 예로부터 지리산에 동남풍만 불어오면 천재지변이 잦았다 한다.
그것은 나쁜 유행병이 퍼져 인명이 상하거나 화재, 홍수등이다.
오행설에 의하면 이러한 동남풍을 제압하려면 동해에 사는 거북의 힘밖에 없다하여 광한루에 이 거북상을 만들었다.
그 후부터는 동남풍으로 인한 천재지변이 없어졌다."고 한다.

 


 

 

 동아시아 신화체계는 대륙 산악 쪽의 곤륜산과 그리고 바다 바깥 쪽의 3신산을 ‘천지창조의 산’으로 올려 세우는데, 서로 전혀 다른 내용 구성이다. 황제와 서왕모가 산다는 곤륜산은 상상의 산이기는 하지만 황하와 양자강의 시원지를 이루기도 한다는 점에서 중국신화의 원형이라 살필 수 있다.

그런데 ‘3신산’의 신화구성은 이 영산이 발해만 바깥쪽에 있는 유토피아였다는 데서 역대 한국인들은 금강산-지리산-한라산에 비정시켜왔다. 원래는 ‘5신산’이었다 했다. 각각의 섬을 자라 세 마리씩 떠받쳐 열여섯 마리 자라들이 옹위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쪽의 섬나라(龍伯國) 사람들이 나타나 여섯 마리 자라를 잡아가버린 결과 5신산에서 ‘3신산’만 남았다 한다.

따라서 3신산은 해동의 ‘동국’에 있는 것이라 유추하고 사라져버린 두개의 산은 아마도 ‘왜국’이 되었을 것으로 비정을 시키는 ‘지리적 상상력’이 고대인들에게 있었던 것으로 살핀다. 그리하여 3신산은 역대 한국인들의 ‘판타지 문화예술자원’으로 활용 계승돼 왔다.

3신산은 고구려 벽화에는 물론이고 백제 무령왕릉 유품인 ‘백제향로’ 속에서도 세밀하게 묘사된다. 미술작품만 아니라 3신산 조경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 공주 공산성의 임류각이라든가 부여의 궁남지에서 재현되고 신라의 월지(‘안압지’라는 호칭은 폐기되어야 한다)에서도 그 신선경을 보이게 한다.

‘산대(山臺)’는 채산(彩山), 채붕(彩棚)이라고도 하였다. 3신산의 지복세계를 재림시키기 위해 이를 연행예술의 ‘마당판’에 올려놓았던 것을 일컫는다. 후기신라 때로부터 팔관회와 연등회 및 민간의 가면극 놀이에서 ‘산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고려 태조 왕건은 5장(丈)의 산대를 세웠다 했으니 대략 16m 높이였다. 조선시대에는 광화문에서 나라축제를 벌일 적에 너무 높은 산대를 세운다는 비판마저 나올 지경으로 궁중의례로 성행되었을 뿐 아니라 민간 세상에까지 널리 퍼지어 ‘민중연희’의 중요한 몫을 했다.

잃어버린 유토피아를 찾아서…. 에덴동산에 비견시킬 3신산 재림 소망의 산대놀이는 이처럼 고대와 중세와 근세를 관류해온 ‘한국문화’였던 것이지만, ‘근대 한국’이 이를 망실시켜 버리게 했다.

 

 

 

 

 

 

 

요강(지금의 요천수) 물가에 서 있는 누각의 빼어난 아름다움에서 지상의 달궁전을 본 것.

달나라에 가서 살 수는 없었으니 아예 땅위에 이상향인 월궁을 세워버렸다

 

 

완월정. 달을 지향하며 만든 누각.

물 위에 떠 있는 완월정은 그래서 동쪽을 향합니다.

옛날 옥황상제가 계신 옥경에는 광한전이 있으며 그 아래 오작교와 은하수가 굽이치고

아름다운 선녀들이 계관(달나라궁전)의 절경속에서 즐겼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 전설에 따라 광한루는 천상의 광한전을 재현한 것이며,

이 완월정은 지상인이 달나라를 즐기기 위하여 겹처마 팔작지붕에 오방집으로 전통적 조선식 누각을 세워

광한루원의 절경을 한층 돋보이게 하고 있다

 

 

이 호석은 현재 광한루안의 완월정 앞 잔디밭에 있으며,

이 호석에 관한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전해지며,

예전에 광한루의 확장이전에는 시장으로 진입하는 거리에 자리했었는데

위치를 옮기어 시장에 커다란 화재가 일어나 다시 원위치로 옮기기도 했었다.

 
남원시 수지면에는 견두산이 있다.

우리말로 말하면 개머리산이 된다.

형태가 개머리를 닮았으며, 풍수지리학에서는

성난 개머리가 남원시내지역을 공격하는 형상이라고 한다.


일부에서는 호두산을 폄하하기 위하여 개머리산으로 고쳤다며,

호두산이란 이름을 되찾자는 운동을 하고 있다


조선후기 이서구관찰사와 관련한 전설에 의하면

견두산에는 들개 떼들이 많이 살고 있으면서 잦은 민폐를 입혔다고 한다.

민가에 내려와 피해를 입히거나 혹은 그로인한 재난이 많았다고 한다.

이에 이서구 전라관찰사는 이를 막기 위한 비방으로 수지와 남원에 호석을 설치하고

호두산을 견두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들개 떼들에 의한 피해가 사라졌다고 한다.

또 다른 전래된 이야기에 의하면,

남원은 관료들의 횡포가 심하여 민심이 흉흉하자 이를 막기 위해서 호두산을 견두산으로 바꾸어

개머리에 비유하고 호석을 세워 견두산을 제압하자 관료들의 횡포가 자제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기도 한다. 당시 전라도 지역은 민심이 흉흉하고 관료들의 횡포가 심하자

조정에서는 이를 바로잡아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조정 중신들의 논의 끝에 전라도 지역의 민심을 신속히 잡지 않으면 조정에까지 위협을 받게되자

이에 대한 대책이 이서구를 전라도 관찰사로 보내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이서구 관찰사는 전라도 전지역을 바삐돌며 여러가지 비책이나 비방 등을 내놓았으며,

이서구가 전라도 관찰사로 왔다는 표식을 신속히 남기는 일이 었는데

이때의 설치했던 표식이 호석이야기란 설이 설득력있어보인다.

그후 여러 가지 남원부도에서도 견두산으로 표현이 되어있고,

또 다른 남원부도에는 대두산으로 표기되어 있어 大-犬 의 오기가 아닌가 하는 의혹도 가져볼 수 있다.


하여간 이서구 관찰사가 보통 분은 아닌 듯하다.

많은 곳에 그 이야기나 전설 들이 전래되는 것을 보면 산수지리나 풍수학에 조예가 깊다,

 

전라관찰사를 두 차례나 하였으며, 남원의 구석구석에 그 어르신의 이야기가 전래되고 견두산이란 이름을 붙여 그로인해 남원의 재앙을 없앴다고 하며, 그 흔적이 오늘에 까지 남겨져 이야기 꺼리를 남기고 있다.


광한루의 호석은 석질이 강하고 규모도 대단함을 알 수 있으며

길게 옆면으로 뻗어진 꼬리 형태의 표현이 잘되어 있다.

특이한 점은 등 부분에 표현된 몇곳의 천공이 어떠한 기준에 의한 배열을 하고 있음을 보면

단순한 개구쟁이들의 돌 장난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닌 듯하며 주역에서의 성혈로 예상된다.

안타까웁게도 이서구 관찰사가 문인이면서 한시를 즐겼고

또한 풍수지리학이나 산수지리학에서도 특별함이 있음을 보면

호석의 등에 성혈은 어떠한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이몽룡과 성춘향인가  !!!

놀란 마음 손이 떨려 사진이 흐리다 ㅎㅎㅎ

혹시나 몽룡이나 춘향이가 초상권 주장할까도 싶고 ....

 

 

( 오작교 지나는 경우와 직녀  ,몽룡과 춘향  ㅎㅎㅎ)

 

누원앞 호수는 은하수의 상징으로서, 은하수옆 누각은 자연스럽게 하늘나라 건물로 표현된다.

이와 같은 표현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문화재 종묘 건물 동편계단 소맷돌이 구름 문양을 새겨서 구름 위에 지은 집인

운상각(雲上閣)이 있는데, 이러한 상징을 이해하여야 구조를 이해할 수 있으며, 답사의 묘미가 새록새록 더해진다.

 

이 호수는 전라관찰사를 지낸 정철의 지시와 부사 장의국에 의하여 모습을 갖추었는데,

이때에 못을 깊게 파고, 전설 속의 삼신산인 영주(한라산)·봉래(금강산)·방장산(지리산)을 만들었다.

호수에는 요천에 흐르는 쪽빛 옥류수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은하를 가로지르는 오작교 다리를 놓아 견우와 직녀가 일년에 한번 만나는 전설을 형상화하였다.

이와 같은 구성물은 하늘나라의 조경을 한층 발전시킨 것으로 광한루원 상징물중 가장 중요한 구성원이 되었다.

이 호수에 물이 가장 맑을 때는 겨울철 지리산 잔설이 녹아 흘러 유입될 때이며, 이 때는 호수 바닥에 나뭇잎 무늬까지도 선명하게 보인다.  

오행중 물이 북장에 자리잡은 이치는 1.6수 물의 이치며,

과연 경탄을 금할수없는 도(道)의 이치가  광한루에 있었을 줄이야!

 

 

 

출처 : 경주 박물관대학
글쓴이 : 세족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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