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혈족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붙여진 것으로, 인류사회는 혈연에서 출발하고 혈연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였기 때문에 원시시대부터 씨족에 대한 관념이 매우 강하였다. 그러므로 자기 조상을 숭배하고 동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씨족의 명예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각 씨족은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하여 각기 명칭을 가졌으며, 그 명칭이 문자를 사용한 뒤에는 성으로 표현되었다고 하겠다.
성씨의 발생을 중국의 경우를 보면 각 씨족의 성은 처음에는 그들이 살고 있는 지명이나 산명 또는 강의 명칭을 성으로 삼았다. 신농씨의 어머니가 강수에 있었으므로 성을 강(姜)씨로, 황제의 어머니가 희수에 살았으므로 성을 희(姬)씨로 하고, 순의 어머니가 요허에 있었으므로 요(姚)씨고 성을 삼은 것은 이를 실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 나라에서 성의 발생을 '사묵사기'에 의하여 살펴보면 주몽은 재사에게 극(克)씨를, 무골에게 중실(仲室)씨를, 묵거에게 소실(少室)씨를 하사하였고, 나라를 고구려라 하고 고(高)로써 성을 삼았다 하였으며, 유리명왕은 사물택이란 곳에 한 장부가 연못 돌 위에 앉은 것을 보았는데, 그가 왕에게 말하기를 왕의 신하가 되고싶다고 말하여 왕은 그에게 위(位)씨 성과 사물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또 유리명왕이 기산에서 사냥을 하다가 이인을 얻었는데 그는 두 겨드랑이에 깃이 달려있어 우(羽)씨 성을 주었다. 대무신왕이 부여를 칠 때 비류수에 이르러 물가를 바라보니 어떤 여인이 솥을 들고 노는 것 같아 가서 보니 단지 솥만 있었다. 사람을 시켜 불을 때게 하였는데 불 없이도 저절로 더워지므로 밥을 지어 군사에게 먹였다. 그때 홀연히 한 장부가 나타나 "이 솥은 우리 집의 것으로 나의 누이가 잃은 것을 지금 왕이 얻었다"하여 짊어지고 따라 가기르 청하니 왕이 부정(負鼎)이란 성을 내렸다. 부여왕의 종제가 부여인과 더불어 고구려에 항복하니 그의 등에 락문(絡文)이 있으므로 락(絡)씨를 하사했다. 대무신왕은 "발소가 위엄을 부리지 않고 능히 지혜로써 악인을 징계하였으니 가위 능란하다"하고 대실(大室)씨라는 성을 내렸다.
백제의 온조왕은 그 세계가 고구려와 한 가지로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여(扶餘)로써 성을 삼았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큰 알에서 나왔고, 그 알이 박과 같다하여 박(朴)으로써 성을 삼았다. 또 유리니사금 9년(32)에는 양부에 이(李)씨, 사량부에 최(崔)씨 , 점양부에 손(孫)씨, 본피부에 정(鄭)씨, 한기부에 배(裵)씨, 습비부에 설(薛)씨를 하사하였다. 김관가야의 시조 수로왕도 황금알에서 탄생하였다 하여 성을 김(金)씨로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석(昔)씨는 탈해니사금에서 비롯되었다. 이상의 여러 예를 본다면 성씨가 만들어진 것은 태어난 근원이나, 인연에 의하거나, 사성에 의하였다고 보겠다. 위에서 살펴본 성씨는 그 발생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성씨의 발생이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은 성씨도 '삼국사기'에 나타난다.
김일성.김택균.이창훈 . 문화유산으로 본 우리문화(2005). 교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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