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택호(宅號)가 있기 마련이다. 택호란 장가를 들면 반드시 생기는 법이고 이름은 처가(妻家)가 있는 곳의 지명을 따르게 된다. 이는 한집안 생활상의 처지(處地)로 보아 주식(主食)을 다루는 주부(主婦)가 본위(本位)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어릴적부터 택호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사람중의 하나이다. 차후에 불려질 택호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짚어보고 장가를 들었으니 내가 얼마나 택호에 대해 신경을 썼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마을 사람들은 남의 사연도 모르고 곧장 나를 <도치골댁>이라 부른다. 분명히 덕천 심씨 문중으로 장가든 나를 터무니도 없는 지명을 들어 <도치골댁>이라 부르는 데는 짜증을 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병신년(1956)에 혼인을 했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시절이다. 그해 여름 어느 토요일 한 주의 학교 수업을 마치고 여느때와 다름없이 고향엘 갔다. 우리집 사랑방에는 일가 어른들이 모여 있었고 주안상까지 차려져 있었는데 그 가운데 낯선 사람도 한 분 있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나의 혼사를 의논중임을 직감할 수가 있었다.
방에 들어가 인사를 올렸다. 아버지께서는 보통 때와는 다르게 희열이 만면한 채 나를 무척이나 반기면서 장가를 가라고 하셨다.
"장가요? 이 나이에 무슨 장가를 갑니까?"
사실은 좋으면서도 슬쩍 거절했더니, 아버지는 "그럼 종기부터 먼저 장가를 보내는 수밖에 없구나"고 하셨다.
"종기를 먼저 보낸다고요. 그건 안됩니다."
조카인 종기부터 장가를 보낸다는 말씀에 나는 그만 오기가 나서 적당한 자리라면 장가를 들겠다고 허락하고 말았다.
이로써 혼담은 절정에 이르렀고 처가될 곳을 물었더니 '마꼴'에 사는 규수인데 재령이씨로 갈암후손이니 좋은 집이라고 중매쟁이는 말했다. 나는 재령이씨고, 갈암의 후손이고보다 '마꼴'이라는 지명 때문에 장가를 들지 않았다. 이유는 바로 <마꼴댁>이란 택호 때문이었다.
옛날 내가 살던 무실 동리에 '마꼴'이라는 남자일꾼 하나가 있었다. 그는 평생을 남의 집 머슴살이로 생계를 이어가는 천덕꾸러기였다. 더욱이 상것에다 머슴살이까지 하는 형편이니 천대와 멸시는 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 어른, 부녀자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를 보고 '마꼴'이라고 불렀다.
어느날 그가 합강댁 디딜방앗간에서 방아를 찧어주고 있었다. 바짓가랑이는 둥둥 걷어부치고 배꼽을 드러낸 채 부녀자들의 온갖 조롱을 다 받으면서도 아무런 반항의식 없이 방아만 묵묵히 찧어주고 있는 그 꼴사나웠던 '마꼴'이를 본 적이 있다.
만약 내가 그곳에 장가든다면 택호는 분명 '마꼴'이 될 것이 아닌가?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마꼴댁'이란 택호가 그렇게도 싫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택호 때문에 혼처를 달리했던 나의 과거지사도 모르고 내 주변 사람들은 나를 곧잘 '도치골댁'이라 부르니 딱 질색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내가 싫어했던 마꼴로 동생 태걸이가 장가를 들었으니 우리 아버지는 재령이씨 가문의 따님을 며느리로 맞아들여야할 숙명적인 인연이라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정작 <마꼴댁>으로 불려야할 태걸이의 택호를 마을 사람들이 <성호댁>이라 부르고 있음은 무슨 까닭일까?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내가 싫어하는 택호를 태걸이가 좋아했을 이유는 만무하다. 태걸이와 나는 4살 터울 형제로 함께 컸으니 그 천덕꾸러기였던 '마꼴'이를 태걸이도 모를 턱은 없다. 그래서 태걸이도 그것이 싫어서 하루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 택호잔치를 벌렸다는 것이다.
마꼴은 안동댐으로 인하여 지금은 수몰되고 없다. 그 당시는 수몰될 위기에만 있었으니 재치있는 태걸이는 자기의 택호를 먼저 예견하고 스스로 작명(作名)하여 호수가 이루어질 곳이란 뜻을 담아 <성호댁>이라 불러줄 것을 당부하면서 융숭한 대접으로 약속했던 까닭에 오늘날 <성호댁>으로 불려지고 있다.
'성호'란 호수가 이루어진다는 의미이지만 그 보다는 당대의 명현이었던 숙종때의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선생의 호(號)와 음(音)이 같으니 더욱 돋보이는 택호라 할 것이다.
이러한 에피소드를 남기고 나는 덕천에 심씨 문중으로 장가를 들었다. 처가집은 원래 덕천 본마을에 있었으나 내가 장가들 무렵에 강건너 양지마을로 옮겨 살았다. 그러니 나의 택호를 <양지마을댁>이라 해도 괜찮을 터인데 굳이 <도치골댁>이라 부르는 사람들의 저의가 어디 있는지 모를 일이다.
'도치골'이란 지명은 옛날 한 선비가 여기서 도를 이루었다는 뜻으로 길 도(道), 이룰 치(致)자를 써서 '道致谷'이라 부르게 된 것인데 그곳은 나의 처가에서 뒤편으로 약 5리정도 들어간 골짜기의 작은 마을이다. 유서깊은 마을이라곤 하지만 건성으로 들어볼 땐 좋지 못한 뉘앙스를 풍긴다. 도치가. 고슴도치 또는 도끼, 도치로 골을 낸다는 등의 온갖 혐오감을 주는 택호이니 내가 싫어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는 일찌기 공무에 몸을 담게 되어 안동 읍내에 와서 산 지도 30년이 훨씬 넘었고 상대하는 사람들의 사고는 그전 무실사람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나를 <덕현댁(德縣宅)>이라고 올바르게 불러주고 있다. 처음에는 <덕천댁(德川宅)>이라 많이 불렀는데 그 <덕천댁>이란 택호는 무실에만 하더라도 네 집이나 있으니 혼동을 피하고자 <덕현댁>이라 작명한 것이다.
이렇듯 택호에 얽힌 사연도 모르고 앞집에 사는 혁상씨는 곧잘 나를 <도치골 양반>이라 한다. 내 택호가 <도치골댁>이란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일랑씨가 가르쳐주었다는 것이다. 일랑씨는 관명(官名)이 동본(東本)인데 용상3아파트에 산다. 그도 핸디캡은 있다. 그것은 바로 자기의 이름이다. '동본'이라 불러주질 않고 아명이었던 '일랑'이라 부르는 데는 딱 질색이라고 그는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정곡은 있다. 정곡이란 쉽게 말해서 아픈 부분을 말한다. 아픈 부분을 건드리는데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말은 듣기 좋게 상대방의 호감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 말하는 데 돈 드는 게 아니다. 말만 잘하면 천냥 빚도 가린다는 속담이 있지 않는가? 아무리 듣기 좋은 콧노래도 한 두 번이지 제발 앞으로는 <도치골댁>이라 부르지 않기를 바란다.
택호란 한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평생토록 지녀야 하고 또 죽어서도 지워지지 아니하는 그 집의 중요한 이름이니만치 아무렇게나 짓고 부르는 것은 금물이다. 좀더 고상하고 품위있는 그야말로 양반스러운 택호를 만들어 불러주어야 한다는 것을 우린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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