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부인의 아름다움에 주목한 서정주와 박진환, 문인수 등은 수로부인 설화의 내용을 대부분 수용하는 입장을 취했고, 수로부인을 그린 신규호와 정의홍은 수로부인의 현재적 의미를 사회 비판적인 지평으로 확대했다는 의의를 갖는다. 여기에 구상은 '추풍령'을 통해 우리 무의식에 자리한 수로부인을 현재적 공간에 되살려내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이때 미녀에서 창녀까지 이르는 수로부인의 다양한 변신은 작품 발표의 시간 순서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위대한 시인이란 전시대의 시인들이 발휘하는 영향력을 무너뜨리려는 용기를 지닌 시인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된다.
이처럼 수로부인 설화는 우리 현대시에서 끊임없이 변주되며 살아 있는 전통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현대시에서 고전 전통이 시인의 치열한 상상력에 의해 비로소 그 생명력을 얻는다는 명제를 구체적인 시 작품들을 통해 검증하였다. 다만 수로부인 설화를 제의나 종교적 수행의 맥락에서 해석한 연구 결과를 반영한 시 작품이 없었다는 점은 지적해야 할 것이다. 실로 이 점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학자들의 연구와 시인들의 실제 창작 사이의 괴리 현상은 우리 문학 풍토에서 매우 심각한 상황에 이른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우리는 그 괴리 현상을 수로부인 설화에 남겨진 또 다른 창조의 공간으로 남겨 두고자 한다. 왜냐하면 수로부인 설화가 지닌 전통의 가능성은 어느 순간엔가 어떤 시인의 상상력을 촉발할 것이고, 그 시인의 상상력은 잠자는 수로부인의 입에 생명력의 입김을 불어넣어 또 하나의 전통을 창조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또 다른 전통으로 거듭나는 수로부인을 기다리는 글이다.
수로부인의 변신. 이성우. 2003. 한국비교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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