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이야기

[스크랩] 요석공주를 향한 원효대사의 노래

눈자라기 2008. 10. 25. 23:09

- 비교종교학자 이명권님의 우리 한시 풀이  -

 

요석공주에 대한 원효의 노래 

자루 없는 도끼를 누가 준다면
하늘 버틸 기둥을 내가 깎으리.

誰許沒柯斧
斫我支天柱

...............................................

이 시는 한국의 100대 민족 문화의 상징가운데 하나이자,

한국 사상사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 중 하나로 꼽히는 원효(元曉, 617-686)가

 통일 신라의 위업을 달성하는데 기초를 닦은 무열왕 김춘추(金春秋, 604-661)의 차녀인

요석공주(瑤石公主)에 대한 흠모의 정을 노래한 시로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 경북 경산시 압량군 자인면 불지촌에서 태어난 원효는 태어나자마자 곧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불운을 겪게 되지만, 젊은 날부터 유, 불, 도에 깊은 공부를 하고

특히 불교에 심취하게 되지요. 그가 태어난 시대는 북쪽으로 고구려와 서쪽으로는

 백제와 잦은 전쟁을 해야 했던 삼국 분단의 피비린내 나는 시대였습니다.

 

 그 자신도 화랑도가 되어 나라를 위해 전쟁에 참가하기도 하지만,

이내 젊은 나이에 황룡사(皇龍寺)에서 승려가 되어 수도에 정진하게 됩니다.

공부를 더욱 깊이 하기 위하여 8살 아래인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오르지만 해골이 고인 물을 마시고,

모든 것이 마음이 빚어내는 것이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유학길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와 불교의 종합과 실천을 위해 힘쓰면서,

 

 『법화경종요』, 『대승기신론소』, 『화엄경소』등의 수많은 저술을 남기게 됩니다.

 그러나 원효가 불교 사상가와 대 학승으로서 수많은 저술을 남기기

 전에 경주에 있는 요석 공주를 사랑하여

 통일신라시대의 대유학자가 된 설총(薛聰)을 낳았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유명합니다.

 

원효와 요석 공주에 대한 사랑의 일화는

일연(一然)이 남긴 『삼국유사』의 <원효불기(元曉不羈)>에 잘 기록되어 있지요.

요석공주에 대한 사랑의 시이지만,

내용이 지극히 상징적이어서 누구나 쉽게 그 뜻을 알 수 없었고,

다만 유언비어처럼 시중에 유포되던

이 시를 무열왕이 전해 듣고는 원효가 요석공주를 사랑한다고 해석하여,

 

신하를 보내 남산(南山)에 있던 원효를 요석공주에게로 안내하는데

 원효가 문천교(蚊川橋)에서 일부러 물에 빠지자

 나졸이 그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말리게 함으로써,

 3일간의 뜨거운 사랑을 나누게 된다는 내용이 전해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원효가 썼던 본문 자체로

다시 들어가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짧은 문장이지만,

내용의 함축이 크기 때문에 오랜 기간에 걸쳐

잘 이해되지 못한 부분도 있고, 잘 못 해석되어져 오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예컨대, 도끼(柯斧)는 왕권을 상징하는 물건이고,

천주(天柱)는 임금을 상징한다거나,

 '헐거워진 도끼'가 남근(南根)을 상징하고,

 

 몰(沒)이라는 글자를 '성적인 교접'으로 본다는 해석 등입니다.

 그러나 한학자 이가원(李家源) 선생의 풀이대로,

단순하게 '몰(沒)'자를 '없는 것'으로 보고,

'자루 없는 도끼'로 해석함으로써,

 

홀로 사는 여성의 음부인 '옥천(玉泉)'을 상징하는 것으로 봄이

 타당할 듯합니다. 남편이 백제와의 전쟁에 나가서 죽음을 당하여

 과부가 된 요석 공주의 '옥천(玉泉)'을 허락해 준다면,

 

 원효는 자신의 '옥경(玉莖)'으로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 내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 '하늘을 떠받칠 기둥(天柱)'이 무엇인가 하는 점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가원 선생은

원효자신의 성적 심벌인 '옥경'으로 해석하는데,

혹자는 '하늘 기둥'을 장차 낳을 현명한 아들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문장의 어순이나 문맥상으로 보아서는 후자의 해석도 타당할 듯합니다.

 과연 설총은 대유학자(大儒學者)가 되어

신라 십현(十賢)의 한 사람으로 꼽혔을 뿐 아니라,

한문을 우리말식으로 풀이하는 '이두'라는 문자를 정리한 학자가 되었습니다.

무열왕의 둘째 딸 요석공주가 꽃다운 나이에 백제와의 전쟁에서

 남편을 잃고, 홀로 된 슬픔을 처연히 달래고 있을 때,

이미 그 소식을 알고 있던 원효는 남산을 중심으로

수도 정진했지만, 한 때 화랑도로서 풍류도(風流道)를 즐겼던

그가 고도의 상징적 기법으로 한편의 짧은 시를 흘려보냄으로써,

 

공주의 옥문(玉門, 陰門)을 열고 신라의 현인 설총을 낳기까지의

 드라마 같은 애절한 사랑의 일화를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원효는 요석궁에서 나와 승려 복을 벗고

 

 누더기를 걸치고, "일체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라는 화엄경의 글이

새겨진 호리병을 들고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며,

 

민중 속으로 들어가 나무아미타불을 염송시킴으로써

귀족불교를 끌어내려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던 것입니다.

 원효는 '십문화쟁론(十門和爭論)'이나 '일승사상(一乘思想)'등에 대한 저술 활동을 하면서

왕과 고승 앞에서 『금강삼매경』을 강의하기도 하지만,

 말년에 소요산(逍遙山)에 들어가 여생을 보내기까지,

 

참으로 진속불이(眞俗不二)의 일심(一心)사상으로 대립을 넘어

 '하나'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

평화와 극락의 사도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효가 그리던 요석 공주 또한 무애(無碍)의 경지 속에서

 드넓은 품으로 원효를 안아 설총을 기르면서,

 다시 넓은 세계로 원효를 돌려 보내준 훌륭한 보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짧은 한편의 시로 우리는 벽을 넘어 역사를 새롭게

 써가는 두 분의 애절한 사랑을 다시 한 번 잠시 가늠해 봅니다.

출처 : 원효대사와요석
글쓴이 : 요석보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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