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흔적을 찾아서](16) 양지스님과 불령사 ②
소박한 전탑, 불성은 폭포수가 되네…
/ 글·사진 이재호 기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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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계곡에는 하얀 물이 쉼없이
쏟아지고,전탑의 전돌에 새겨진 수많은 불상과 탑들은 천년의 이끼 속에 잠들어 있다. 불령사 전탑이 풍경 속에서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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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하면 경주 불국사만큼이나 익숙한 운문사가 있지만 운문사는 뒤로 미루고 일반 사람들은 처음 듣고 기행 마니아들도 잘 모르는 청도 불령사를 찾아 나섰다. 거기에 양지 스님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늘은 구름을 머금고 있었고 산은 안개에게 자유를 주어 안개는 제멋대로 산허리를 맴돌고 있었다. 가지산 아늑한 계곡에 여승이 머물고 있는 석남사는 꽃구름 속에 숨어 있었고 나는 숨가쁘게 운문령을 넘었다. 몇몇 곳을 제외하고 문화유적이 산재한 한국의 어디라도 내 발길은 닿았는데 이곳에 이르니 아스라한 옛 추억이 아련거린다. 내가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총무를 맡았던 시절에 유홍준(현 문화재청장) 대표는 회원들을 데리고 서울에서 출발하고 나는 나그네가 되어 석남사서 이 비포장 산길(지금은 2차로 아스팔트)을 따라 운문령 고개를 넘어 운문사까지 걸어가면서 얼마나 설빃고 행복했던가.
운문댐은 물을 머금었다 토해내고 청도의 온 산천은 푸름과 물뿐이었다. 산천이 사람을 만든다고 이런 산천에 살았던 사람들은 얼마나 순박했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내가 아는 청도사람들은 한결같이 순박하다. 스님들이 좋아하는 자장면이라고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스님자장'으로 유명한 동곡을 지나 매전면에서 불령사 길로 접어들었다. 아무런 불만 없이 넓은 냇가의 물은 흘러가고 불령사를 계곡 안에 숨겨놓은 호랑산은 안개를 품고 있었다.
길 옆에는 일찍 핀 백일홍,복숭아가 수줍은 붉음을 푸른 잎에 가리고 참깨도 부끄러워 연분홍 꽃을 내밀고 있었다. 대추도 감도 도라지도 모두 모두 성숙의 대열에 합류했다. 점점 좁아지는 계곡에 빨려 들어갔다. 까만 바위와 대조를 이루면서 하얀 물줄기가 마음껏 소리치고 있었다.
# 한국의 전탑들
옛날이나 지금이나 대중들은 스타에게 열광하거나 몰리게 돼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 어느 절이나 '스타스님' 원효 아니면 자장이나 의상이 창건했다고 한다. 창건주가 안 되면 부속 암자 중에 원효암이 있든지,혹은 자장암 아니면 의상대라도 있다. 마치 서원이 학문보다는 문중과 학맥 중심으로 흐를 때 퇴계나 율곡,우암과 조금이라도 인연을 엮어 여기저기서 배향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불령사도 원효가 선덕여왕 14년(645)에 창건했다고 하니 양지 스님과 동시대에 연결된다. 양지 스님이 주석했던 경주 석장사지에서 출토된 전돌에 새겨진 불상과 탑이 이 불령사의 것과 모양이 비슷하다. 그래서 이 불령사를 양지 스님이 만들었거나 감독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아니면 제자라도….
불령사에는 전탑이 있다. 그런데 전탑은 우리나라에서는 귀한 편이라 나는 매우 흥분되었다. 중국은 진흙이 많은 자연조건이라서 건물을 짓는 데 곧잘 벽돌로 쌓는다. 일본은 습도가 많은 해양성 기후라 어디서나 나무가 쑥쑥 잘 자란다. 우리나라는 단단한 화강암이 많아 석조문화가 발달했다. 흔히 중국을 전탑,일본을 목탑,한국을 석탑의 나라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화는 물과 같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기 때문에 낮은 데서 수용할 때 문화의 꽃은 피어나게 된다. 문화를 수용할 때 처음에는 'FM'대로 하게 되어 있다. 우리나라도 처음에는 목탑을 세웠다. 그러나 목탑은 내구성이 없어 발달하지 못했고,전탑도 진흙이 귀한 데다가 덩어리 큰 석탑과 달리 한번 무너지면 원형을 알 수가 없어 그렇게 많지가 않다. 신라의 수도 경주만 하더라도 전탑으로 온전한 것은 하나도 없고 현재까지 두 곳의 전탑지 흔적만 있다.(분황사탑은 전탑을 모방한 모전석탑이다.)
전탑을 시도했지만 진흙처럼 찰기가 없는 마사토라 탑을 만드는 데 애를 먹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양지 스님이 만든,영묘사의 장륙삼존은 진흙을 주물러 만든 소조불이라 성안의 남녀들이 진흙을 멀리서 어렵게 구하여 날랐다. 당시 노동의 힘듦을 덜기 위해 '오라. 오라. 오라./ 오라. 슬프구나./ 서럽구나. 우리들은!/ 공덕 닦으러 오라.'는 풍요(風謠)가 불렸던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동원되었으니 그 불상을 만드는 데 곡식 2만3천700석이 들었다는 것이 이해된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는 전탑은 5개뿐이다. 특이하게 경북 안동에 3개(법흥동 7층,조탑동 5층,법림사지 5층)가 있고,나머지 두 개는 여주 신륵사와 칠곡 송림사에 흩어져 있다. 그런데 여기 불령사의 전탑은 왜 '전탑의 로열 패밀리'에서 빠져 있을까. 아마 1966년께 허물어진 뒤 1968년에 손을 보았는데 당시 엉성하게 조성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보물도 아닌 경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서자 취급도 제대로 못 받고 있는 실정이다.
# 불령사의 이모저모
불령사가 나에게 건넨 첫 인사는 가파른 계곡에서 하얀 물줄기를 쏟아내는 것이었다. 어디에서 저렇게 많고 하얀 물을 쏟아낼까. 단 1초도 쉬지 않고….
불령사는 워낙 경사지고 좁은 공간이라 계곡을 따라 지그재그로 올라가면서 배치돼 있었다. 언제 절이 허물어졌는지 모르지만 1912,1930년에 각각 중수한 절이라 깊은 맛은 없고 철 구조물로 공간을 확보해 놓은 것이 눈 맛을 흐리게 했다. 하지만 제일 높은 절벽 위에 우뚝 솟아있는 귀한 전탑은 하늘의 선녀를 보는 듯 가슴에 짜릿한 설렘을 전해 주었다. 계곡까지 내려가 물을 껴안고는 가파른 계단을 다시 올라 전탑 앞에 섰다.
정선 정암사의 수마노탑이 산 언덕에 크게 서 있어 느긋한 낭만의 긴장을 준다면 이 탑은 하얀 물줄기를 콸콸 쏟아내는 폭포수 절벽 위에 세워져 있어 드라마틱한 절정의 긴장으로 짜릿한 아름다움을 던져준다. 쌓아올린 전돌 하나 하나에 새겨진 불상과 탑이 파란 이끼와 더불어 불성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어제 동국대 경주캠퍼스 박물관에서 자세히 보고 온 석장사지 출토 전돌에 새겨진 불상과 탑은 대단한 회화적 감성을 주었지만 여기는 원칙대로 불상과 탑을 전돌에 새겨 넣었다. 이 탑도 국가적인 관심으로 잘 복원했더라면 국보나 보물급이 될 터인데 아무렇게 쌓아 올려 일부는 내려앉았고 균형과 비례도 완벽하지 않았다.
그러나 깊은 계곡의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탑은 지극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화려하고 잘난 절을 보다가 이런 절을 보고 있으면 자아를 되돌아볼 수 있고 마음도 숙연해진다.
수직으로 내리뻗은 절벽 아래의 계곡에서는 하얀 폭포가 두 갈래로 마음껏 울부짖고 있었고 하늘이 맑아오자 울음을 참았던 매미도 구슬피 울어댔다.
위대한 예술 조각가 양지 스님이 여기 와서 직접 만들었을까? 불단에는 좋은 대학 합격을 발원하는 촛불이 켜져 있다. 우리 모두 함께 잘되게 비는 날은 언제쯤일까. 이 탑을 다시 세우면서 시주를 한 사람들의 이름이 빽빽이 적혀 있다. 주로 인근 시골사람들의 소박한 시주라 가슴이 찡하지만 미적으로 볼 때 이름을 빽빽이 새겨놓은 건립비는 흉물스럽다. 꼭 세우겠다면 코앞에 세우지 말고 시선을 방해하지 않는 곳에 그 이름도 '청도 ○○면의 아름다운 불자들',이런 식으로는 할 수 없을까. 개미 한 마리가 불전함을 기어 다니고 나는 산길을 더 올라 속세를 잊을 만한 무릉계곡에 혼자서 침묵으로 대화를 하다가 내려왔다.
오랜만에 쨍한 날씨가 되어 '지리한 장마 끝에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라고 이어지는 만해 한용운의 시 '알 수 없어요'가 떠올랐다.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옛 탑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아마도 양지의 향기일 것이다. 하천에서는 낚싯대가 하늘로 치솟아 춤을 추고 있다.
출처 : 산처럼 학처럼(마음산/심뫼방)
글쓴이 : 마음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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