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나기

[스크랩] 불교의 시간관

눈자라기 2008. 10. 25. 23:00

[소광섭 교수의 불교와 시간]⑥ -불교의 시간관 1
부파·대승 견해따라 시간관도 제각각
기사등록일 [2008년 04월 28일 월요일]
 

“찰나멸 찰나생” “모든 것은 空” 대립
구사론서 우주·시공간·생명론 다뤄

아프가니스탄 하다지역에 위치한 명상하는 부처님들.

서양에서 시간에 관한 논의가 철학사상의 변천에 따라 달라졌듯이 불교의 시간론 역시 그 철학사상사적 전개와 밀접히 관련되어있다. 불교의 철학적 전개를 크게 초기불교(또는 근본불교), 부파불교, 중관불교, 유식불교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초기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 재새시부터 열반 후 일백년 정도까지의 시기이고, 이 기간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결집한 정도로서 특별히 교리의 철학적 논의가 발전되지 않았었다. 그 후 점차 교리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게 되고, 여러 의견이 개진됨에 따라 그 주장에 따라 유파가 발생되어 20개 정도의 부파가 서로 경쟁을 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를 부파불교시대라 한다. 이들 중 특히 후세에 까지 많은 영향을 미친 부파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인데 글자그대로 ‘모든 것이 실제로 있다[一切有]’라는 학설을 주장하는 학파였다.

이들이 주장하는 ‘있는 것’은 이른바 법(法)이 있다는 것이었다. 법(法)은 불교에서 핵심용어이면서 동시에 아주 다양한 의미로 쓰인다. 불·법·승(佛法僧)에서 법은 진리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뜻이다. 다른 의미에서 법은 일반적인 사물 또는 존재하는 것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설일체유부 등 부파불교에서 쓰는 법은 일반적인 사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요소라는 의미였다.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현상적인 물질을 구성하는 근본요소를 원소라고 하는 것과 유사하다. 말하자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원소인 셈인데, 여기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대부분이 마음에 관한 것이다.

설일체유부는 존재의 기본 요소로 5가지[5位]의 75법[75法]이 있다고 하였다. 5위(位)는 색(色), 심(心), 심소(心所),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 무위(無爲)이며, 색에 11법, 심 1법, 심소 46법, 심불상응행 14법, 무위 3법, 총합 75법이다. 이러한 75가지의 원소인 법들이 상호작용을 하여 이합집산으로 세상 일이 인식된다고 보는 견해이다.

“일체가 있다.”는 주장은 바로 이 ‘법(法)’이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실제로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앞에 놓인 사물이 항상 있듯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예를 들어 책상위의 컵은 얼마 전이나 지금이나 계속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법의 이론’에 의하면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고, 실은 일체 법이 ‘찰나생 찰나멸’하는데 여러 법의 연기에 의하여 컵의 모습을 나툴 뿐이란 것이다. 즉 법은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실유(實有)하지만, 찰나생 찰나멸하기 때문에 길이가 없는 한 순간만 존재한다. 그러나 한 순간 한 순간이 이어져 경험적 세계에 연속적 시간의 흐름 속에 계속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며, 이들 법의 모임과 흩어짐을 관장하는 것이 연기의 법인 셈이다.

부처님의 ‘제법무아(諸法無我)’와는 달리 ‘유부(有部)’의 주장은 ‘있다’는 것을 주장하므로 이는 잘못된 것이며, 부처님의 원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불교개혁운동을 일으킨 분이 용수보살(Nagaljuna, 서기 150~250)인바 유(有)와 무(無)의 단견에서 벗어나 중도(中道)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것이 대승불교의 시작으로 이른바 ‘공(空)’사상을 높이 선양하였다.

공사상의 원래 취지는 유무초월의 중도였음에도 불구하고, 허무주의적 착각과 오해가 편만해지자 이에 대한 또 한 번의 혁신운동이 무착보살(Asanga, 서기 310~390)과 세친보살(Vasubandhu, 서기 320~400)이 일으킨 ‘유식(唯識) 불교’였다. 이는 존재의 관점에서 공사상을 계승함과 동시에 인식론 내지 심리학적 관점에서 대승불교의 사상을 새롭게 전개한 것이다. 서구식으로 말하면 프로이트와 융의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의 세계에 대응하는 인식적 차원에서 제7, 제8식과 같은 깊은 ‘아라야식’의 세계를 논한 사상이다. 그러므로 불교인식론 또는 심층심리학의 전개라 할 수 있겠다.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을 ‘경(經)’이라 하는데, 각 시대별로 소의 경전이 다르다. 초기 및 부파불교시대의 경은 『아함경』, 『법구경』등이고, 중관불교의 경은 ‘반야’계통의 경으로 『금강경』, 『반야경』등이며 유식불교는 『해심밀경』, 『입능가경』을 대표적 경전으로 한다.

경에 바탕하여 철학 내지 교리학적 논의를 전개한 것을 ‘논(論)’이라 하며, 초기불교에는 아직 ‘논’이 없었고, 부파불교시대의 사상을 총정리 결집한 것으로 세친보살이 쓴 『아비달마구사론』 줄여서 ‘구사론’이 대표적 논서이다. 중관불교의 대표적 논서는 용수보살의 『중관론(中觀論)』인데 불교사상사에서 최고의 논서로 꼽힌다. 유식불교의 경우 무착보살의 『섭대승론(攝大乘論)』이 대표논서이며, 마명보살의 『대승기신론』 줄여서 『기신론 (起信論)』은 대승불교의 교과서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흔히 삼장(三藏) 법사란 말을 듣는데, 삼장이란 경(經)장, 율(律)장, 논(論)장을 말하며, 경장은 부처님의 설법을 기록한 것, 율장은 계율을 기록한 것이고, 논장은 경과 율에 관한 해설, 철학적 논의 등에 관한 것으로 이를 ‘아비달마’라고 한다. 부파불교를 아비달마불교라고도 하며, 아비달마 논서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손꼽히는 것이 바로 세친보살의 『아비달마구사론』이다.

『구사론』은 총 9품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이 중 ‘제 3 세간품(世間品)’이 불교의 우주론, 시간공간론, 생명론을 다루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다룬 것은 세간품(제8권부터~12권까지) 중 제 12권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듣는 찰나, 겁, 삼천대천세계 등의 상세한 설명을 여기서 볼 수 있다.

불교의 시간관을 고찰함에 있어서 먼저 『구사론』에 바탕하여 부파불교 특히 ‘일체유부’의 시간관을 살펴볼 것이며, ‘찰나생 찰나멸’, ‘현재와 삼세, 어느 것이 실제로 있는 것인가?’, ‘우주의 성주괴공과 겁(劫)을 고찰하려한다. 부파불교의 시간관을 비교적 상세히 논하려는 것은 현대물리학(상대론, 양자론)과 의미 있는 비교가 가능한 때문이다.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소광섭 교수

[소광섭 교수의 불교와 시간]
불교의 시간관2
기사등록일 [2008년 05월 26일 월요일]
 

‘세계는 고화질 TV화면’
불교-물리학 견해 동일

시간이 연속적인가 아니면 최소단위가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생각했던 것이지만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현대물리학에서 상대성 이론은 연속적 시간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양자론과 일반상대론이 결합되면 시공간이 양자화 되어 시간의 최소단위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아직까지 양자론과 일반 상대론의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시간의 근본문제는 그대로 남아있다.

『아비달마구사론』에서는 시간에 최소단위가 있다고 보았으며, 이 최소시간을 ‘찰나’라고 하였다. ‘찰나’의 구체적인 수치(75분의 1초) 자체는 깊은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최소의 시간단위를 도입한 세계관은 현대과학기술의 관점에서도 의미심장하다고 여겨진다.

아비달마 논사들이 시도한 것은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설명하는 논리적 체계였다. 『구사론』에서는 ‘제법’을 75개의 기본이 되는 법들의 인연에 따른 결합과 분해로 이해하려했다. 이 75법의 대부분은 마음과 마음 작용 및 인식에 관한 것들이고, 물질적인 요소는 색(色)이라는 법으로 포함되어 있다.

만약 설일체유부의 75법이 불변적이고 영속적인 요소라면 그것을 유아(有我)라고 하는 것이므로, 제법무아의 가르침에 어긋나게 된다. 그래서 기본법은 생성되자마자 한 찰나에 소멸해야 될 논리적 필요가 있게 되었다. 한편 제법은 기본 75법이 인연 따라 여럿이 모여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어떤 기본법이 생성되어 소멸되는 시간이 찰나이고, 생멸하는 기본법들의 집합에서 어떤 형태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 작용일 뿐 실재가아니란 것이다. 이 찰나 생멸의 관점을 비유를 들어 이해해보자.

고화질 HD-TV의 화면을 보고 있노라면 실재보다 더 사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고요한 호수, 흐르는 강물, 그 속에 노니는 물고기들이 현실 상황보다 더 리얼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영상화된 용이나 공룡의 모습은 온 몸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이어서 현실과 가상의 구별이 없어지는 듯하다. 앞으로 정보기술이 더욱 발달하면 3차원의 가상현실과 우리가 실재로 살고 있는 세계의 구분이 사실상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TV 화면을 현미경으로 확대해 보면 수많은 작은 LCD조각들이 바둑판처럼 빽빽하게 깔려있다. 이 LCD조각을 화소라 하는데, 각 화소는 켜지거나[生], 꺼지는 것[滅] 외에는 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 “각 화소가 찰나에 생멸할 뿐인데, 이들의 집단에서 연극을 보고 스포츠를 즐기는 것은 우리들의 인식작용이 그런 상을 만들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생멸하는 화소의 집단에 이야기가 있고 주인공이 있고 하는 것은 ‘아(我)’가 있어서가 아니라 인과적 이야기 정보가 화소들의 생멸을 관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제법무아’에 관한 현대적 비유이다.

『구사론』에서 주장하는 세계관은 우리의 현실세계가 3차원 TV화면이란 것이다. 이 관점이 현대물리학적으로 얼마나 타당할까? 놀라울 정도로 정곡을 찌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발달해온 물리학이론의 결정체를 양자장론(Quantum Field Theory)이라 한다. 이 이론에서는 빛, 전자 등의 소립자를 다루는데, 거기에서 쓰이는 핵심개념은 소립자들의 생멸이다. 예를 들어 책상에 놓인 한 컵의 물을 보자. 우리의 눈에는 연속적인 물이 고요하게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백만 배 정도 확대해 본다면 불연속적인 물 분자들이 빠른 속도로 왔다갔다 운동하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 또 다시 백만 배 정도 더 확대한다면 TV의 화소처럼 소립자들이 요란스럽게 생멸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양자장론이 밝힌 바로서 이 세계는 소립자들의 생멸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TV의 화면과 실제의 자연은 매우 유사하다. 맨 밑바닥은 기본요소들의 생멸이 있을 뿐이다. 좀 크게 보면 분자와 같은 작은 존재가 있는 것처럼 보이고, 더 크게 보면 컵과 물의 모습이 드러난다. TV화면의 컵이 그렇듯이 실제의 컵도 우리의 인식작용이 만들어낸 허구의 상에 불과하며, 이러한 상에 아(我)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구사론』이 제시한 제법무아의 해석이다. 소립자 물리이론은 물론 TV같은 기술이 전혀 없던 그 옛날에 ‘찰나 생멸’과 같은 디지털세계관을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놀라운 상상력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구사론』에 의하면 찰나와 같은 가장 짧은 시간에 반하여, 우주는 겁이란 긴 시간 단위가 있다. 1대겁(大劫)마다 우주가 한 번 생겨났다 다시 없어진다고 한다. 즉 1대겁은 성·주·괴·공이 각 20겁씩 총 80겁이다.

성겁(成劫) 동안에 처음에는 공간과 물질의 세계[이를 기세간(器世間)이라 함]가 이루어지고, 그 다음 점차 생명체[좀 더 일반적으로 유정(有情)]들이 범보천[33천등 각종 하늘세계 중 높은 곳]을 비롯하여 점점 낮은 세계로 퍼져서 인간이 사는 지상세계 그리고 끝으로 최하의 지옥인 무간지옥에 태어나 살게 되는데 이렇게 되는데 걸리는 기간이 20겁이다.

유정들이 20겁 동안 머물면서 지내는 기간이 주겁(住劫)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기는 아마도 주겁에 속하지 않는가 싶다. 주겁이 시작하는 제 1겁 동안에 인간의 수명은 거의 무한대의 긴 수명으로부터 10세에 이르기까지 줄어든다. 제 2겁에 다시 수명이 늘기 시작하여 8만세에 이르렀다가 다시 감소하여 10세로 줄어든다. 제 3겁부터 제 19겁까지는 수명의 증감이 반복된다. 제 20번째 겁에서는 10세부터 증가하여 8만세에 이르는 것으로 끝난다.

괴겁(壞劫)은 성겁의 반대로 지옥부터 중생이 없어지기 시작하여 마침내는 기세간도 모두 불타 없어진다. 그런 후에 아무것도 없는 공겁 (空劫)이 역시 20겁을 지속하게 된다. 『구사론』에는 겁의 길이가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고, 상상할 수 없는 긴 시간을 의미한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현대 물리학적 우주론의 이른바 빅뱅이론에 따르면 우주의 역사는 150억년 정도가 되므로 1대겁도 그렇게 긴 시간에 대응한다고 볼 수 있겠다.

다만 한 가지 흥미 있는 점으로 인간의 수명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기에 인간의 수명의 점점 늘어 감을 체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평균 수명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30~40년이었는데 요즘은 70~80년으로 늘어난 점이다. 요즘의 생명공학의 발전 추세로 본다면 인간이 몇 백 년씩 젊고 건강하게 사는 시대가 곧 도래할 듯하다. 세포·조직·기관의 재생기술이 불가능할 이유가 없는데다가 요즘 생물과학의 관심이 이 주제로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구사론』에 나온 대로 몇 천 년 몇 만 년씩 살게 된다면 인생관과 세계관 그리고 종교는 어떻게 될까?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소광섭

[불교와 시간]8. 불교의 시간관3
현실은 삼세 공존하는 중중무진의 세계
기사등록일 [2008년 06월 09일 월요일]
 
 
지금 보이는 세계가 그대로 현재의 세계라고 할 수도 있고, 수많은 다른 과거의 별들이 중첩되어 있는 세계라고 할 수도 있다.

유부 삼세실유설은 과학적
현재만이 실재라는 건 오류

아비달마 논사들의 첨예한 논쟁거리 중 하나가 삼세(과거·현재·미래)와 사물의 실재성에 관한 것이었다. 경량부는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고, 설일체유부는 “과거·현재·미래의 일체법은 실체적으로 존재한다[三世實有]”고 하여 팽팽히 맞섰다.

우리의 일상경험으로 볼 때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흘러간다. 우리는 현재에만 살고 있는 것이고, 과거는 지나간 것이고 미래는 오지 않은 것이므로 오직 현재만이 실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너무 명백한 사실로 보이는데 왜 ‘삼세실유’같은 엉뚱한 학설이 나오게 되었을까? 상대성 시공간론에 비추어 이 문제를 고찰해 보자.

나에게 과거·현재·미래가 있듯이 내 옆 친구에게도 과거·현재·미래가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런데, 나의 현재가 내 친구의 현재와 같은 것일까? 이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까? 물론 나의 시계 12시와 내 친구의 시계 12시를 다 같이 국가표준시계에 맞춰놓고 보면 두 사람의 현재가 같을 것은 명백한 일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상황은 이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상대론에 의하면 달리는 시계는 흐름이 다르다고 되었으니까 내 친구가 가만히 있지 않으면 그의 현재가 나의 과거나 미래에 해당할 수도 있을 것이고 따라서 문제가 복잡함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를 좀 더 과학적인 것으로 바꿔서, 지구로부터 10광년쯤 멀리 떨어진 별에 사는 친구 ET를 생각해 보자. 이 친구에 대한 소식은 빛으로 알려 와도 10년은 걸리고 다른 수단으로는 이보다 더 걸린다. 오늘 낮 12시에 그 별에서 친구 ET의 동생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빛으로 막 알려왔다고 하자. 그럼 현재 ET동생의 나이는 몇 살일까? 그야 물론 10살일 것이다. 그래서 나의 12시 현재와 저 별에서 ET동생의 10살 생일파티가 동시이고 우리와 같은 현재의 세계이다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 생각은 나의 관점에서 세상사를 보고 있으며, 앞서 말한 경량부의 주장과 일치하고, 상대성 이론에서도 맞다고 인정한다.

그렇지만 상대론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고 일종의 편견이라고 말하고 있다. ET군이 자기 동생이 태어남을 보면서 광속 로켓을 타고 지구로 출발했다면 낮 12시에 이곳에 도착했을 것이다. ET군에게 “네 동생 몇 살이니?”라고 물으면 그는 “0살. 지금 막 태어났어.”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에겐 ET동생의 출생이 10년 전 과거일이지만 그에게는 오늘 현재인 것이다. 왜냐면 우리가 삼세(과거·현재·미래)로 구분하는 것과 그가 삼세로 구분하는 기준이 전혀 다른 때문이다. 달리 말해 우리에게는 ET동생의 생일파티는 현재이므로 실제로 있는 것이고, 그 동생의 출생은 10년 전 과거이므로 실재가 아니다. 그러나 ET가 보기에는 자기 동생의 출생은 아주 조금 전 일이므로 사실상 거의 현재나 다름없고, 동생의 생일파티는 미래의 일이다.

상대론에서 과거·현재·미래의 구분은 운동하는 관찰자마다 다르므로 나에게 과거사건이 다른 사람에게는 미래의 사건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재만이 실재다.”란 말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 과거세계는 지나가서 없어졌고 미래세계는 오지 않았으니 없다는 것도 틀렸다. 따라서 상대론에서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사건들의 전부를 함께 다룰 수밖에 없으며, 이것이 시공간의 통합이다.

‘설일체유부’의 ‘찰나생 찰나멸’과 ‘삼세실유’설은 상대성 이론이 나오기 전에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학설이었고, 거의 궤변에 가까운 것처럼 보였었다. 그러나 상대론과는 거의 ‘부합여절’이라 할 만큼 세계관이 일치한다. 통합된 시공간에서는 삼세의 모든 사건이 함께 펼쳐져 있기 때문에 이를 통째로 보는 관점에서는 실로 삼세실유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시공간을 형성하는 요소를 사건이라 하는데, 이것은 한 점이기 때문에 그 길이가 없는, 진정한 찰나생멸이다. ‘법’이 존재가 아니고, 존재의 인식 ‘요소’라고 보듯이, 상대론에서 다루는 ‘사건’도 ‘사물’이 아니고, 사물을 형성하는 ‘요소’란 점에서 유사하다.

그러므로 ‘통합된 시공간상의 모든 사건’이 바로 ‘생멸하는 법의 삼세실유’를 생각했던 ‘설일체유부’의 주장과 상통한다. 좀 더 비유적으로 말하면 ‘4차원 시공간의 연속체 상에서 생멸하는 소립자들(TV화소의 켜짐과 꺼짐의 시간적 집합에 비유)’이 ‘삼세실유’에 해당하고 우리들이 인식하는 사물들(TV화면에서 우리가 보는 영상들에 비유)은 하나의 상에 불과하며 무아이고 무상인 것들이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 있노라면 저 별들과 내가 함께 현재 이순간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머리로 생각해 보면 별들에서 온 빛은 가까이는 몇 년 전부터 멀리는 몇 천만 년 몇 억 년 떨어진 곳에서 온 것이니 내가 보고 느끼는 현재의 세계는 실은 수많은 과거가 중첩된 세계인 것이다. 사실 엄밀히 말한다면 가까운 나의 주변 존재들도 모두 다른 시간대의 중첩이다. 그런데, 상대론적으로 생각하면, 우리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모두 현재의 세계이기도 하다. 몇 만 광년의 먼별에서 출발한 빛이 보여주는 소식 그대로가 지금 이곳의 나와 함께 ‘현재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머리로 생각하기 전의 느낌 그대로가 상대론적 관점이다.

결론적으로 ‘나의 현재의 세계’가 다른 사람에게는 과거나 미래의 세계일 수 도 있으므로 ‘현재의 세계만 실체’란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특수 상대론이란 좁은 관점에 한해서 고찰했는데, 일반 상대론까지 고려하면 위치마다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데, ‘현재의 세계’란 것이 제대로 정의될 수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따라서 과거·현재·미래로 나누는 이 생각 자체를 반성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이에 대승 ‘공(空)’사상의 시간관이 등장하는 것이다.

소광섭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소광섭 교수의 불교와 시간]⑨.-불교의 시간관4. 끝
현대과학의 시간 이해는 불교이론 증명하는 과정
기사등록일 [2008년 06월 23일 월요일]
 
 
현대과학은 이제 시간의 주관성을 인정하지만 불교는 그것을 넘어 주관과 객관마저 부정한다. 사진은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영속성’.

 

뉴턴식 시간관은 부파불교에서 이미 극복
물리학 혁명 또 있을 땐 공사상 입증될 것


공(空) 사상과 시간

대승불교의 기본사상은 공(空)사상으로 알려져 있는바 ‘모든 법(존재 또는 현상)은 그 본체라 할 불변 영속의 본질을 갖고 있지 않다[이를 무자성(無自性)이라 함]’는 뜻이다. 이는 대상과 주관이 모두 개체로서는 공한 것이며, 인연에 따라 연기(緣起)로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일상생활에서 인식의 대상인 개체 사물에 명칭을 부여하고 개념[相]으로 파악함으로써 마치 실체가 있는 존재로 집착하게 되며, 이런 사유습관에서 시간도 실체가 있는 것처럼 집착하게 된다고 반야계 대표경전 중 하나인 「팔천송반야(八千頌般若)」에서 말하고 있다.

“과거의 법에 대하여 ‘법은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것은 집착이며, 미래의 법에 대해서 ‘법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집착이며, 현재의 법에 대해서 ‘법은 지금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집착이다.”

과거·현재·미래로 분별하여 고정된 명상(名相)으로 나눌 수 있다고 시간을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집착이란 것이다. 그래서 반야사상에서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법의 법성은 과거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고, 현재에도 없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현재에도 없는 법성은 삼시(三時)를 넘어선 것이다.”

용수보살의 『중론』에서도 일체 법의 공을 엄밀하게 논하고 있다. 우리가 인식하는 현상은 자성(自性)을 가진 존재가 아니고,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인식대상으로 나타나 보일 뿐임을 강조하고 있다. 시간에 관련된 내용은 간접적으로 여러 장에 흩어져 있는데, 제19장 「시간의 고찰」은 직접적으로 시간의 실체성을 부정하고 있다.

첫째로 시간상 과거·현재·미래의 구분이나 공간상의 상중하의 구분은 상대적 관계성만을 말할 뿐 어떤 본질이나 자성(自性)이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로 시간의 머무름이든 흘러감이든 인식될 수 없으며 따라서 시간의 상(相)을 말할 수 없다. 셋째로 사물과 현상을 바탕으로 시간이 있다고 파악하면, 일체 법이 공한 것인데 어떻게 시간이 실체로서 있을 수 있겠는가 이다.

『중론』 전체의 목표가 사물[法]의 실체성의 부정 즉 공사상의 주장에 있는 만큼 시간에 대해서도 역시 실체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과학적 시간론과 비교하면 뉴턴의 절대적 시간의 존재는 부파불교에서도 이미 부정되고 있고, 상대론적 시공간론은 부파불교의 ‘삼세실유설’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시공간 또는 우주가 상대적이긴 하지만 객관적 현상으로 있다고 보는 관점은 공사상과 어긋난다. 주관과 객체가 분리되어 있다고 보는 근·현대 과학의 철학적 틀이 대승불교의 공사상 또는 유식사상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물리학은 앞으로 더 큰 혁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유식사상과 시간

불교의 핵심은 마음이다. 유식(唯識) 불교는 이 마음이 어떻게 이 세상을 만들고 있는가를 깊이 연구한 불교의 인식론이며 심리학이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5개의 감각기관(눈, 귀, 코, 혀, 몸)을 통해서 정보를 받아들이는 5식[識: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과 이들을 처리하여 저장(기억), 상상, 계산, 언어표현 등 지식활동을 하는 제 6식 즉 의식(意識)의 작용이다. 이 6개의 식(識)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알고 있는 마음의 세계이며, 이 세계는 우리의 뇌 속에서 일어나는 주관적 현상으로 바깥의 대상과는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관점은 사실 현대과학의 자연관 및 인간관이라 할 수 있으며, 부파불교의 심리학과도 일치한다.

이 6식의 피상적 마음보다 더 깊은 심층심리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 유식불교의 주장이다. 무착(無着, 310~390) 보살과 세친(世親, 320~400) 보살이 체계화한 유식사상은 6식보다 깊은 제7식(말나식)과 제8식(아뢰야식)이 일체유심조의 마음이라고 본다. 제7식은 이른바 ‘나’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자아의식으로써 일상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꿈꾸고 있을 때나 최면상태 심지어 몸이 죽었을 때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른바 ‘윤회’를 하는 식이다. 현대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는 개인적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뢰야식은 융(C. G. Jung)이 제안한 ‘집단 무의식’과 유사한 점이 있는바 모든 중생들의 업이 일종의 종자로서 갈무리되어 있으며, 인연에 따라 현세화 된다. 이 아뢰야식은 우주 전체를 포괄하는 것으로 일체의 현상을 통섭하고 이로부터 모든 것이 생겨난다. 이 아뢰야식에서 무명(無明)에 의해 업식(業識)이 생기고, 이 업식에서 개체성을 띠는 전식(轉識)이 나타나 이것이 주관을 형성하는 망념된 마음[妄心]이 되며, 다시 인식대상[妄境界]을 만들어 마치 온갖 현상이 있는 것처럼 본다.

그러므로 유식사상에서는 현상 이전에 주관이 더 기본이고 주관이 허망한 대상들을 만들어 낸다고 본다. 달리 말하면 이 세상은 하나의 꿈이란 것이다. 꿈속에 나타나는 것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하나의 잠재의식 속에서 만들어졌듯이 이 세상도 모두가 아뢰야식의 전변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시간도, 과거·현재·미래의 구분도, 윤회, 인과관계 모두가 아뢰야식에서 나타나는 허상의 일부이며, 실재가 아니다.

의상대사의 법성게(法性偈)에서 “무한히 먼 겁이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곧 무한 겁이다.”[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이란 구절은 시간이 곧 식(識)에서 비롯된 것이요, 따라서 객관적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주고 있다. 우리의 일상적 생활이나 객관적인 자연과학에서는 시간은 가장 엄격한 실재이다. 그럼에도 칸트의 철학에서는 시간은 우리의 직감의 내적 형식이며 범주의 도식이라 하여 주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였고, 코페르니쿠스적 대선회라고 스스로 평가하였다. 구체적 내용은 아주 다르지만 시간이 주관에서 비롯됐다는 관점은 유식사상에 가까워진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앞으로 물리학과 뇌과학 및 심리학이 더욱 발달하면 대승불교의 유식사상과 그 시간관이 새롭게 조명될 수 있을 것이다.

소광섭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출처 : 賢雲齋 현운재
글쓴이 : 성고운(3)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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