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이야기

[스크랩] 신대현의 역사에 비춰진 불교현장 - 미륵사지

눈자라기 2008. 10. 25. 22:58

미륵신앙과 대중이 만나 역사를 일구다

〈3〉미륵사지

 
 
미륵사지로 가려면 익산역 바로 앞 함열역에 내리면 되건만 KTX는 함열역을 눈길도 주지 않고 매정히 지나쳐 버린다. 저 어디쯤이 미륵사지일 텐데 하며 달리는 차창 너머로 내다보니 너른 들판 뒤로 틈실히 자리잡은 미륵산이 보인다. 나주평야나 김제평야처럼 일망무제까지는 아니더라도 익산 역시 제법 들판이 너른 축에 속하여 미륵산은 더욱 높아 보인다. 그 아래가 바로 미륵사지다. 사람들이 잘 모를 뿐이지 익산 역시 경주나 부여 같은 유서 깊은 역사도시로, 도읍을 이곳으로 옮기려 했던 백제 무왕(600~641) 당시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익산 천도의 웅대한 청사진 한가운데는 미륵사가 자리 잡고 있다. 무왕이 미륵신앙을 통해 대중의 힘을 모아 부국강병을 이루려 했던, 불교와 대중이 만나는 최초의 역사현장이 바로 미륵사지인 것이다.
 
 
 
미륵신앙과 대중이 만나 역사를 일구다
 
백제 무왕 미륵사 창건해 불국토 천명
     
신라공주와 결혼…드라마틱한 삶 살아
 
미륵사가 창건된 과정은 <삼국유사> <무왕>조에 잘 나와 있다. 간추려보면 이렇다. “무왕이 부인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미륵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길, 산 아래 연못가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미륵삼존불이 솟아나왔다. 왕과 왕비는 수레에서 내려 경배하였고, 미륵불의 계시임을 깨달은 왕비는 미륵삼존불이 용출한 연못자리에 절을 지을 것을 왕에게 부탁하였다. 지명법사는 신통력을 발휘하여 하룻밤 만에 용화산 한쪽을 허문 흙을 날라 연못을 메워 터를 닦고, 금당 세 채와 탑 세 개를 지었다. 절 이름은 미륵사라고 하였다.”
 
불교적 관점에서 이 창건설화는 <미륵하생경>에 보이는 미륵신앙의 완벽한 번안이라고 할 만하다. 용화산이 등장한 것은 미륵이 하생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며, 금당 세 채를 세운 것 역시 미륵불이 3회에 걸친 설법을 통하여 중생을 교화한다는 경전 속의 이야기와 같다. 그리고 무왕과 선화공주가 가던 용화산 위의 사자사는 미륵이 하생하기 전 도솔천에 있을 때 앉았다는 사자상좌(獅子床座)를 상징한다.
 
<사진> 미륵사지 서탑
 
또 무왕이 용화산 아래를 지나다가 미륵불의 출현을 맞게 된 것은 전륜성왕이 성불한 미륵불에게 나아가 설법을 들었다는 경전의 이야기와 시대와 배역만 다를 뿐 기본적으론 같다. 다시 말하면 무왕은 그 자신을 전륜성왕에 비겨서 미륵사를 창건했고, 미륵불이 상주하는 용화세계와 같은 불국토를 건설하려 했던 것이다.
 
한편 역사라는 스펙트럼 위에 미륵사를 올려놓으면 쇠락한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자 자신의 정치적 거접인 익산으로 수도를 옮기고 왕권의 상징으로서 미륵사라는 거대한 사찰을 창건토록 한 무왕의 웅략이 드러난다. 백제에 있어서 여타 불교사상은 귀족불교로서의 성격이 짙은데 비해 미륵사상은 서민문화의 융합을 이끌어내어 사회통일과 왕권강화에 커다란 힘이 되었다고 한다. 미륵사의 창건은 바로 이러한 사회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으며, 백제가 미륵불이 나타나는 불국토임을 천명함으로써 백제의 중흥을 이끌어내었다는 것이다.
 
사실 무왕처럼 드라마틱한 삶을 산 군주도 드물다. 그의 생애는 역사와 설화가 한데 섞인 채 전해진다. 무왕이 선화공주와 결혼한 것부터가 그렇다.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딸이다. 백제의 왕이 어떻게 신라의 왕녀와 결혼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의 출생과 왕위 등극에 관한 이야기는 차라리 환영을 보는 것 같다.
 
<사진> 미륵사지 원경.
 
정사 쪽 기록에는 그가 29대 법왕의 아들이라거나 혹은 27대 위덕왕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설 등이 있다. 하지만 야사에는 어머니가 용과 관계해서 그를 낳았다고 한다. 사실 어머니가 용과 관계해서 출생했다는 설화는 고대사에 심심찮게 보인다.
 
용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은 주인공의 아버지가 매우 지체 높은 신분이었거나 세상에 알려져서는 곤란한 정치적 거물인데 비해서 어머니는 미천한 집안일 때 흔히 쓰는 수사법에 다름 아니다. 신화의 내용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지 않다고 해서 무조건 부정해서는 안 되고, 그 안에 감추어진 상징과 의미를 들여다보는 게 바로 신화를 읽는 독법(讀法)이다. 이래야 신화가 싱싱해지고 살아 숨 쉬게 된다.
 
어쨌든 무왕도 그런 경우여서, 아버지 쪽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고 그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것으로만 되어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마(薯)를 캐어 내다팔며 살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마를 캐는 아이’, 곧 서동(薯童)이라고 불렀다. 당시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는 백제에게까지 알려질 정도로 소문난 미인이었다. 서동은 선화공주를 배필로 점찍었다. 그는 신라로 잠입해서는 저잣거리의 아이들을 구슬려 서동과 선화공주가 밀회를 즐기는 연인사이라는 내용을 담은 노래를 부르며 다니게 했다. 바로 ‘서동요’다.
 
이런 노래는 파급효과가 큰 법. 대번에 신라 전체에 유행하게 되고, 급기야 사실인 것처럼 알려지게 되었다. 아주 난처해진 진평왕은 처음엔 선화공주를 구박했지만, 서동이 선화공주와의 혼인을 간청하자 그만 못이기는 척 허락하고 만다. 선화공주와 함께 백제로 돌아온 그는 마를 캐던 밭에서 황금을 캐어 부를 얻었고, 이를 기반으로 결국 왕위에까지 올랐다.
 
백제 후기의 탁월한 군주인 무왕의 어린 시절, 그리고 선화공주와의 센세이션한 국제결혼(?) 이야기는 가히 환상적이다. 이것을 단지 신화요 전설이라고만 하고 말아야할까? 사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감수성이 풍부해지고 살아 펄펄 뛰며 갯냄새 물씬 나는 그런 신선한 역사가 고동치고 있는 걸 본다. 때로는 어느 게 역사이고 어느 게 신화인지 모를 순간도 있다. 햇빛을 받으면 역사요, 달빛에 물들면 신화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모양이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역사 속에는 신화나 전설 이 웅크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륵사는 바로 그런 역사와 신화가 한데 섞여 있는 현장인 것이다.
 
사실 앞서 말한, 미륵삼존불의 계시를 받아 무왕과 선화공주가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설화는 발굴을 통해 상당부분 사실로 판명되었다. 미륵사는 1980년부터 1996년까지 발굴되어 황룡사지와 더불어 우리나라 고고발굴사상 가장 오랫동안 발굴된 유적으로 기록된다. 또 면적도 1338만 4699㎡로, 국내 절터 중 가장 넓다. 나란히 세워졌던 세 탑 중 유일하게 남은 서탑(西塔), 석등 부재 등은 창건 당시의 유물이다. 이 중 서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본래 7층 혹은 9층이었으나 조선시대 때 무너져 6층까지만 남아 있다가 최근 복원수리 중에 있다. 중탑은 목탑으로 추정되고, 동탑은 1993년에 복원되어 절터 한켠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 탑은 ‘폭파해버리고 싶은 탑’이라는 험한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다지 존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사진> 쌍릉 중 무왕의 능.

미륵사지는 역사라든지 출토유물의 많고 적음 등 유형적 가치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뭔가 가늠할 수 없는 무형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고 있는 것을 느끼곤 하기 때문이다. 나는 1990년부터 이듬해까지 미륵사지 발굴조사단원으로 있었다. 미륵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옆 작은 초가를 숙소로 썼던 나는 밤마다 미륵사지 경내 구석구석을 홀로 거닐며 그 옛날의 미륵사를 상상하고 곧잘 황홀경에 빠지곤 했었다.

익산에는 백제 무왕의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 중 하나인 석왕동에 있는 쌍릉으로 발길을 돌렸다. 쌍릉은 이름 그대로 두 개의 능인데,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이라고 전한다. 쌍릉을 조금 지나 북쪽으로 가면 ‘서동 생가지’라는 곳도 있다. 1,400년 전 그가 태어난 곳을 어떻게 정확히 알기에 생가지라고 고증했을까 싶지만 어쨌든 그 정도로 지역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다.
 
익산 시내 몇 곳의 거리 이름이 예전과 달라진 게 눈에 띤다. ‘미륵사지로’, ‘무왕로’ 등등의 이름이 도로표지판에 큼지막하게 적혀 있고, 게다가 ‘서동요 촬영지’라는 지명 아닌 지명도 도로표지판에 나온다. 무왕은 익산 천도와 미륵사 창건을 통해 미륵의 세상을 구현하려 했다. 비록 천도는 실패했지만, 그가 세운 미륵사는 이 땅에 건재하고 또 오늘날 도로에까지 그 이름이 붙게 되었으니 마냥 실패한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신대현 / 논설위원ㆍ사찰문화연구원

출처 : 달리는법당거리의포교사(대전운불련)
글쓴이 : 학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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