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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德川書院(덕천서원)과 山天齋(산천재)

눈자라기 2008. 10. 25. 22:48

소재지 : 경남 산청군 시천면 원리 222-3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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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德川書院(덕천서원)]

 

조선선조 9년(1576)에 사람들이 南冥 曹植(남명 조식)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그가 강학하던 자리에 서원을 세운 것이다.

 

광해군 원년(1609)에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으나
대원군때 철폐되었고 그 후 1920년대에 유림들에 의해 복원되었다.

 

남명 조식선생은 연산군 7년(1501) 陜川(합천)군 三嘉(삼가)에서 출생하였고
55세 때 丹城(단성)현감 직에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였다.

 

선생의 諱(휘)는 植(식), 字(자)는 楗仲(건중), 본관은 昌寧(창녕)이며,

남명은 선생의 號(호)이다.

 

61세에 이곳 德山(덕산)에 들어와 강학하다 72세 때인 선조 5년(1572)

2월28일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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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솟을삼문인 時靜門(시정문)]

 

솟을삼문인 時靜門(시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敬義堂(경의당)이 있고
그 앞쪽으로 東齋(동재)와 西齋(서재)가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처음엔 曺植(조식)선생의 위패만 모셨으나,

그 뒤 그의 제자인 崔永慶(최영경)을 추가 배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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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원의 강당인 敬義堂(경의당)]

 

경의당은 서원의 각종 행사와 유생들의 회합 및 토론장소로 사용되던 곳으로

'德川書院'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서원의 중심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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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齋(동재) 進德齋(진덕재)]

  

1609년에 강당 동재 등 서원의 건물들이 완성돼 옛 모습을 거의 회복하였다.
이해 봄 나라에 서원의 이름을 청하니 덕천 서원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후로 덕산서원에서 덕천서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사액 서원이 되었다.

경재, 의재이던 동재와 서재를 進德齋(진덕재) 修業齋(수업재)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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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齋(서재) 修業齋(수업재)]

 

강당인 경의당만 복원 중건되었던 덕천서원은 1926년에 건물들이 대략 복원되었다,
지금 현존하는 덕천서원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부분적인 보수와 건물 개축 등을 거치면서 1576년 창건 당시와는
많은 차이가 있으나 남명의 숨결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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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이 처음 창건될 당시에는 서원에 물을 끌어들여 못을 만들고
연꽃을 심었으니 그 규모는 현재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렇듯 장엄한 규모를 자랑하던 덕산서원은 1592년 임진왜란을 만나
불행하게도 강당 재실 정자가 모두 불에 타 버렸으며,  

그로부터 9년후인 1601년 진주목사 윤설(尹說)이 진주 선비들의
요청에 의하여 서원 중수를 계획하였다.


이때 청주목사를 역임한 모촌 이정과 당시 원장인 백곡 진극경,
창주 하징이 교대로 서원의 중수를 담당하였다.

 

그 이듬해 서원의 건물들이 비로소 완성되었다. 임란 때 불탄 지 10년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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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德川書院(덕천서원) 앞 洗心亭(세심정)]

 

洗心亭(세심정)은 '마음을 씻는 정자'란 뜻으로 주역에 나오는
'성인이 마음을 씻는다(聖人洗心)'라는 말을 따라 그 이름을 붙였다.

 

洗心亭(세심정)이란 이름은 남명의 제자 진주 수곡 선비 각재 하항이 지었다. 

 

남명 선생은 이 정자에서 쉬었거나 공부한 일이 없다.
남명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남명 선생과 전혀 관계가 없는 정자는 아니다.

 

남명 선생이 세상을 떠난 4년 후인 1576년 선생의 제자들이
덕천서원(당시는 덕산서원이었음)을 건립하여 위패를 봉안하고 나서,
1582년 서원 건립에 앞장섰던 남명의 제자 守愚堂(수우당) 崔永慶(최영경)이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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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冥(남명)의 詩碑(시비)]

 

냇물에 목욕하며

 

온 몸에 쌓인 사 십년간의 허물
천 섬 맑은 물에 모두 씻어 버리네
만약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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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山天齋(산천재) 입구]

 

 이 곳은 남명 조식선생이 61세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던 장소이다.


'山天(산천)'이란 '周易(주역)' 大蓄卦(대축괘)로
"굳세고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
의미를 담고 있다.

 

선생은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이 곳에서 국왕에게 세 차례 글을 올려,
국가와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과,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것을 건의하였다.


백성과 나라를 걱정하던 노학자의 정신을 이어 받아 지켜야겠다.
선생이 이 곳에서 지은 것으로, 선생의 훌륭한 뜻과 높은 기상이 잘

나타나 있는 詩(시) 한 수를 소개해 봅니다. 

 

 

德山卜居
덕산에 살 곳을 잡으며

 

春山底處无芳草
봄 산 어디엔들 꽃다운 풀 없으리오마는
 
只愛天王近帝居
상제와 가까워 천왕봉만이 사랑스럽네
 
白手歸來何物食
맨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고 살겠나?
 
銀河十里喫猶餘
맑은 내 십리 마시고도 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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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天齋(산천재)]

 

16세기 조선의 학계에는 위대한 대학자 두 사람이 있었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이 바로 그들 이들은 각각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를 형성한 영남 사림의 양대 宗師(종사)였다.

 

퇴계가 온건파라면 남명은 강경파였다.
남명 조식 선생은 퇴계 이황선생과 쌍벽을 이룬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학문이 깊은

사람이었으나 평생 벼슬에 나서지 않고 야인으로 지내 처사라는 칭호를 듣는 분이다.


옛말에 '정승 열을 낸 집보다 처사 한 명을 낸 집이 더 낫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처사에 대한 사람들의 예우는 높았다한다.

 

조식 선생은 지리산을 좋아해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이 자리에
산천재를 짓고 기거했다고 전해진다.

 

산천재에서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아, 선생의 제자들이 후에 일어난

임진왜란에 큰 역활을 하였다한다.


현재 산천재에는 본당 건물인 산천재와 사랑채 그리고 작은 서고가 하나 있을 뿐이다.
산천재와 가까에는 선생을 모신 덕천서원과 산천재 길 건너편에는 선생의 묘가 있다.

 

그가 이렇다할 벼슬을 하지 않고, 또 번번이 사양한 것은
정치판의 오물에 오염되거나 도구화할 것을 극구 경계한 탓이었다.


벼슬을 하지 않은 채 산림 거사로 있으면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지조에 찬 재야적 언설로써 세상을 움직였다는 점에 남명의 독보적인 면이 있다.


남명 선생이 67세 되던 1567년에 명종이 승하하셨다.
남명은 그날 산천재 앞 덕천강변에서 꺽지회를 드셨는데,

그 앞으로 말을 거꾸로 타고 지나가던 오일봉


"산림처사는 국상이 나도 술이나 먹고 있는가?"

 

남명은 입속의 꺽지를 뱉고 일어서 곧 바로 북향사배
상복을 입었다는데 남명 입에서 나온 꺽지는 살아갔는데
그후 덕천강 꺽지는 그때 상처로 인해 한쪽 눈이 멀었다고한다.

 

새끼일 때는 양 눈이 멀쩡하나
철들만큼 크면 한 쪽 눈이 백태


꺽지는 덕천강의 '외눈박이 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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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山天齋(산천재)]

 

7세 때부터 부친의 임지로 따라다녔는데,
그 시절에 정치의 득실과 백성들의 고충을 직접 눈여겨보게 되었다.


19세 때 산 속에 있는 절에서 독서를 하다가 조광조(趙光祖) 등의 죽음을 들었고,
또 숙부 언경도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어진 사람들이 간신 배에게 몰려

경륜을 펴지 못하는 것을 못내 슬퍼하였다.

 

25세 때 과거를 위하여 절간에서 공부하다가, 원나라 학자 허형(許衡)이
"벼슬에 나아가서는 이룬 일이 있고, 물러나 있으면서는 지조를 지켜야 한다.
벼슬에 나아가서도 이룬 일이 없고, 물러나 있으면서도 아무런 지조가 없다면,
뜻을 둔 것과 배운 것이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라고 말한 구절을 읽고

크게 깨달았다한다.


임종시에 모시고 있던 제자 金宇毋(김우옹)이
"명정에 어떻게 쓸까요?"라고 물으니 선생은

"처사(處士)라고 쓰는 것이 좋겠다."라고 대답하였다.


선조는 곧 예관을 보내어 제사지내고, 대사간을 추증하였다.
광해군 때에는 文貞公(문정공)이란 諡號(시호)가 내려지고, 영의정에 추증 되었다

 

 

 

 

[음악 / 홀로 앉아서(대금독주) / 황대익님]

 

[사진. 글 / 草阿(초아) 박태선(안내판과 인터넷참조)]

 

 

2006년 4월 11일

 

 

출처 : 이보세상
글쓴이 : 이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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