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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폴릿 뗀느의 '영국문학사' 서문

눈자라기 2008. 3. 21. 00:46

 

 

 

이폴릿 뗀느의 '영국문학사' 서문

 

 

 

문학작품은 작가 자신의 상상력의 발휘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습관과 관습의 기록이며 지식의 증후이다. 따라서 우리는 특정한 문학운동을 살펴봄으로써 선인들이 무엇을 느꼈으며, 무엇을 생각했는지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과거의 감정이나 사고들을 고찰해 본 결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즉 그것들은 과거의 사건들을 적절하게 해명해 줄 뿐만 아니라 역으로 과거의 사건들을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이러한 감정이나 사고의 역사적 중요성이 고증된다. 이러한 것들의 역사적 가치의 수용은 곧 역사의 이해 그 자체에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역사 이해의 목적과 방법론과 수단과 규범에 대한 생각을 전환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도 일어나고 있고 미래에도 지속적으로 일어날 이 변화가 본 논문의 초점이라 할 수 있다.

 

 

 

고서의 누렇게 탈색한 페이지를 넘기면서 당신은 무슨 생각부터 하는가? 모르긴 해도 당신은 작품이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암반 속 깊숙이 새겨진 한 생명의 자취인 조개껍질 화석과도 같은 것이다. 이 화석 뒤에 한 생명체가 존재하듯이 한 작품 뒤에는 그 작품을 집필한 작가가 존재한다. 한 생명체에 대한 정보를 구할 목적이 아니라면 구태여 화석을 연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같은 맥락에서 한 작품을 연구하는 것은 곧 그 작품의 창조자를 연구하는 것이다. 물론 화석화된 조개껍질이나 작품은 죽은 파편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들이 살아 있는 한 존재의 자취이기 때문이다. 이 존재의 실체를 파악하여 재구성하는 것이 바로 문학연구의 주된 목적이라 하겠다.

 

 

 

작품연구에 있어 하나의 작품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현재의 입장에서 과거의 작품을 해석하는 것은 위험성이 뒤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품 뒤에는 자신의 지적 상태에 상응하는 어휘나 이미지들을 활용한 한 인간이 존재한다. 따라서 진정한 역사의 이해는 나름대로의 습관이나 목소리, 형상, 그리고 복장을 갖춘 생동하는 과거의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시간의 벽을 넘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당신이 한 사람의 한두 가지, 아니 무수히 많은 감정들을 두루 파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당신은 그 사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한 비망록이 작가의 심리상태를 완벽하게 대변하고 있다고 보는가? 모든 학문적 연구가 그렇듯이 객관적인 사실들이 충분히 수집된 다음에는 원인에 대한 진지한 탐색이 뒤따라야 한다. 하나의 사실은 자체적으로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그 사실 배후에는 특정한 원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모든 생체 현상 뒤에는 특정한 원인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야심이나 용기나 성설성 뒤에는 반드시 원인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하나의 문학작품의 생성과 관련된 직접적인 요인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바로 인종, 환경, 그리고 시대가 그것이다. 여기서 인종이란 인간이 선척적 또는 유전적으로 타고난 특성을 말하며 서로 다른 인종들은 기질이나 신체적 구조에 있어 현저한 차이를 나타낸다. 이러한 특성은 국가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띠게 된다.

 

 

 

소나 말과 마찬가지로 인간들 사이에도 다양성이 존재하는데 어떤 사람은 용감하고 영리한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은 비겁하고 우매하며, 어떤 이는 고차원의 관념에 대한 이해력이 뛰어나며 창조적 능력을 겸비한 반면 어떤 이는 극히 기초적인 사고나 계획수립에 있어 진척을 보이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일 처리능력에 있어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은 특정한 본능적 요소가 유난히 발달한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현상을 개에 비유하면 어떤 종은 달리기에, 어떤 종은 싸움에, 어떤 종은 사냥에, 또 어떤 종은 집을 지키거나 양떼를 돌보는데 특히 뛰어나다.

 

 

 

이러한 인종적 특성은 독특한 원동력을 동반하는데 이러한 원동력은 워낙 강하게 부각되기 때문에 다른 두 요소(환경과 시대)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쉽게 확인된다. 예컨대 아리안(Arian) 종족의 경우 갠지스 강에서 히브리디스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토에 흩어져 살면서 다양한 �의 조건속에서 3000년에 걸쳐 많은 변화를 거듭해 왔다. 하지만 그들은 언어, 문학, 철학에 있어서 결속력 있는 지성의 공동체 면모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들은 시공의 영향을 초월하여 그들의 혈통을 지켜 왔다.

 

 

 

우리가 2, 3천 년 전의 아리아인, 이집트인, 중국인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갖고 있는 서로 다른 기질적 특이성은 세월의 변화 속에서 창출된 일종의 문화유산임을 파악하게 된다. 비유적으로 볼 때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환경에 적응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각기 다른 나름대로의 신진대사를 터득하고, 각ㄱ기 다른 방법으로 종족보존을 꾀하게 되는데, 이 경우 환경, 음식, 온도 등의 요소들은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서로 다른 기후와 자연적 여건은 서로 다른 생존의 여건을 마련하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서로 다른 유형의 행동거지, 풍습, 그리고 능력을 요구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환경과 균형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적절한 기질을 개발하게 된다. 아울러 이러한 기질적 측면들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계승되면서 더욱강하게 부각되며 안정성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민족성은 그 민족의 과거의 총합이라 할 수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진부한 진리속에서도 민족성만큼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 듯싶다. 이러한 현상을 저울에 비유하면 유구한 역사 속에서 축적되어 온 영향의 하중 때문에 한쪽으로 기운 민족성은 이에 버금가는 새로운 영향이 존재하지 않는 한 좀처럼 반대쪽으로 기우는 법이 없다. 이처럼 우리는 인종의 지대한 영향에 대해 파악할 수 있지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특정한 민족성은 단지 하나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호수나 깊은 저수지처럼 축척되어 온 다양한 요소들의 총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인종의 영향 못지 않게 환경의 영향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다른 인간들과 더불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아리안들과 여타 종족들 사이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한다. 이러한 차이는 지역적 차이의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안 종족의 경우 기온이 낮고 습한 우거진 숲과 늪 또는 거친 대양의 경계선에 위치하면서 다분히 호전적이고 강한 민족적 기질을 키워 온 반면 그리스인의 경우 경치가 수려하고 온화한 지중해에 정착하면서 유희를 즐기고 화술에 능한 민족적 기질을 통해 과학, 예술, 그리고 문학에 괄목할 만한 유산을 남길 수 있었다.

 

 

 

나무의 경우 적당한 물, 온도, 토양이 보장되면 새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된다. 이 경우 새싹의 상태는 나중에 올 꽃의 상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꽃의 희생을 통해 결국 열매가 맺게 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원리를 중세 시대나 고전주의 시대에 대한 이해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특정한 시대는 특정한 지배담론을 낳는다. 부연하면 인류는 특정한 시기를 거쳐오면서 어떤 이상적인 인간상에 집착하게 되는데 중세기의 경우 기사와 수도승, 그리고 고전주의 시대의 경우 궁정인과 세련된 만담가가 그 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창조적이고 보편화된 관념은 소속 집단의 행동거지와 사고에 지대하고도 체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쇠퇴와 소멸의 길을 걷게 되고 결국에는 다른 새로운 관념에 의해 대체된다. 이 경우 새로이 정착한 관념은 구시대의 관념과 다소나마 의존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아울러 이러한 새 관념은 민족적 자질과 환경적 요소와 더불어 앞으로 올 차세대 관념들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한 나라의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물의 분수령을 중심으로 능선들이 형성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능선 아래에는 5, 6개의 큰 분지가 있으며 각 분지마다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결국 이러한 복잡한 망상구조는 하나의 국가(수천 가지의 불규칙한 지형으로 구성된 국토)를 형성하게 된다. 흡사한 방법으로 어느 특정한 문명의 지도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실재적인 지도와 마찬가지로 한 문명의 지도가 몇 가지의 잘 구획된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파악하게 된다. 종교, 예술, 철학, 국가, 가족, 그리고 산업이 그것이다. 아울러 각 영역은 좀더 세분화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분은 일상적으로 관찰되는 삶의 무수히 많은 세세한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문명을 구성하는 부분 요소들은 유기체의 각 부분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상호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동물의 경우 각 기관들이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다른 부분들의 변화를 가져온다. 같은 맥락에서 한 문명을 구성하는 각 부분 요소들(예컨대 종교, 철학, 문학, 예술 등)의 변화는 그 문명 자체의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 이렇듯 각 요소들이 상호의존적 관계를 맺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역량 있는 생물학자라면 한 생물체의 부분 요소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 생명체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재구성할 수 있어야만 한다. 아울러 역량 있는 역사학자는 특정한 문명의 부분 요소들을 통해 그 문명의 전체적 특성을 파악할 수 있어야만 한다.

 

 

 

- 출전 : 이상우 외, 집문당, 2002, "문학비평의 이론과 실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