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적 ‘사랑’의 의미 재고
“사랑이란 너무 생각한 나머지 생겨나는 일종의 타고난 고통이다.” (Capellanus).
사랑이라는 것은 이렇게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 ‘무엇’에서부터 시작한 것인지 미처 깨달을 새도 없이 다가와 버린다. 자그마한 트럭에 온 가구를 싣고 하염없이 높은 길을 향해 달려가는 어린 인호는 우연히 예쁜 부잣집 딸 미주를 만나게 된다. 인호가 전학 온 반에는 어김없이 미주가 앉아 있다. 그렇게 그 둘의 인연은 시작된다. 그저 잠깐 본 것만으로 풋풋한 첫사랑을 시작한 ‘채소’할 때 ‘채’자를 쓰는 채인호는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그저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된다.
엄마의 강제에 못 이겨 선을 보는 인호의 상대자는 “무슨 일을 하세요?”라며 묻는다. 요즘의 세태가 서로 ‘사랑하는 상대’ 보다 ‘조건에 맞는 상대’를 찾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점에서 이 둘의 사랑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을 확인시켜 준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열녀문’이라는 것이 있어왔다. 그것은 남편과 사별한 여인이 정절을 지키며 세워지는 것으로 간통을 엄히 금하였던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 시대의 간통은 결혼의 여부를 떠나서 한 사람과의 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를 따졌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의 모습은 전통의 그것과는 너무도 달라졌다.
섹슈얼리티와 감정중심으로 대표되는 현대의 사회에서의 사랑의 수식어는 수절, 지조 등과는 한참 멀리 와버렸다. 올해 개봉된 영화 작품들만 해도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 ‘바람피기 좋은 날’ 등 스와핑, 불륜, 간통 등의 문제들이 주류를 타고 있다. 그것은 드라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면에서 곽경택 감독의 『사랑』의 전통적 회귀성은 괄목할 만한 시도라 여겨진다. 물론 고전적 플롯과 하강구조, 지나친 우연의 구성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곽경택 감독의 진정성에 힘입어 ‘사랑’에 대한 현대인들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작품이라 여겨진다.
희극적 결말
애상적 플롯은 주인공이 자신의 잘못이 없는데도 불운을 겪고 있는 공감적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그의 사고는 순진하거나 결함이 있다. 관객들은 그의 고난적 과정들에 대해서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되며 세계의 가혹성을 느끼게 해 준다.
『사랑』의 애상적 플롯은 채인호의 별명 ‘깍꿍이’에서 시작된다. 순종적이며 지독하게 질긴 그의 운명적 삶은 그렇게 결정지어 졌나보다. 그것은 미주의 오빠와 엄마가 죽었을 때 노잣돈으로 주기로 했던 동전의 앞, 뒷면과 같이 삶을 오락가락하게 한다. 서로를 바라볼 수 없는 동전처럼 그 둘은 이루어 질 수도, 만나려 할수록 더욱 더 멀어지기만 한다. 그들이 이 운명을 탈피하고자 도망을 치려해도 그들은 단지 그 안에서 갇혀 있을 수밖에 없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깍꿍이’는 주어진 운명을 도망가려 하지 않는다. 그는 미주를, 운명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맞서 이겨내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절벽에서의 날아오름은 삶에 대한 실패나 운명에 의한 좌절감의 미화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을 기어코 이루고자 하는 그의 염원이며 소망, 도약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은 희극적 플롯이라 할 수 있다. 춘향이가 이몽룡 도령과 한양으로 떠나는 것처럼 미주와 채인호는 ‘변사또’를 이겨내고 ‘월매’를 설득시켜 그 둘의 유토피아로 떠난 것이다.
풍선의 세계
러시아의 형식주의자들 중 슈클로브스키는 ‘낯설게 하기’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는 예술작품에서 단순한 인지가 아니라 주변세계를 낯설게 하고 그것을 통한 충격으로 낯익게 하며 궁극적으로 인지가 확실시 된다는 것이다.
『사랑』은 부제목 ‘a love’에서 보이는 의미처럼 보편적 의미의 사랑을 그리지 않았다.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와 만나서 사랑하는 과정을 그렸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랑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대로 올라가 보면 소설 ‘무정’에서의 한계점이 ‘지나친 우연’이었던 것이 떠오른다. 영화는 지나친 우연이 너무 많이 등장한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으로 대표되는 현대시기에서 이들의 우연은 심지어 하나의 풍선 속에 이들의 인생만이 가득 차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정점인 사랑과 운명에서 도망치려 하지만 표면에 튕겨져 되돌아 나와 다시 정점에서 만나는 듯하다. 이 둘의 사랑은 평범하고자 밖으로 나가고 싶지만 팽창할수록 다시 튕겨져 돌아오게 되는 운명적 사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영화를 접하는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다소 지루하고 진부하고 지독한 영화이다. 답답하고 이상적 유토피아만을 �는 듯이 보이는 채인호에게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생각하라고 수십 번 넘게 주문을 한다. 주인공이 변화하길 바라는 긴장을 그대로 끌고 나가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끝내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릴 만큼 냉정하게 마무리를 짓는다. 인호의 칼에 튿어져 날리는 깃털처럼 미주는 몸을 날리었고, 이슬 머금은 눈빛의 인호도 날아오르며 막을 올린다.
그 감정을 토향내며 정리라도 하라는 듯이, 이해하지 못할 이들의 사랑을 지금 다시한번 떠올려 보라는 듯이, 당신의 사랑은 어떤지 반문해 보라는 듯이 그 눈빛을 하염없이 쳐다보게 만든다. 실로 이 장면이 끝이 아닐 것이라는 믿음에 한참의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풍선이 터진 후의 공허함이랄까, 끝내 했던 기대를 저버린 인호의 자살로 한 숨을 쉬고 있을 때, 인호와 미주는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사랑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나의 사랑이야기입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라고 말이다. 사랑은 하나의 지시물이 아닌 개개인의 인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여자는 순간이다”라고 말하는 그의 아버지적 존재에게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지는 아닙니다.” 그의 생각이 곧 그의 사랑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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