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우리 조상들은 상상외로 가난했었다. 대동법(大同法)이라는 토지개혁을 감행했던 인조 때 정승 김육(金堉)이 빈부를 둔 이상적인 촌락 구조로서 부반빈반설(富半貧半說 )을 주장했던 것만으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머슴을 들여야 하는 부농층이 10%, 자급
자족하는 중농층이 40%, 땅 한 뙈기 없이 품을 팔아 호구하는 영세층이 40%, 늙거나 병들거나 과부, 고아 같은 노동력도 없고 땅도 없는 피보호층이 10%만 구성되면 안정 된 마을로 쳤으니 얼마나 가난한 안정이었던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 빈부 구조에서 먹고 살 수 있는 50%가 저만 먹고 살기에 급급했다면 나머지 50%는 굶어죽었어야 한다. 한데도 극심한 가뭄이나 난리가 일어나거나 돌림병이 돌 때가 아니면 굶어 죽는 법이 없었으니 어떤 까닭, 무슨 조화 때문이었을까.
나라에서 경제 정 책을 잘 써서도 아니요, 또 구빈(救貧) 정책을 잘 써서도 아니다.
촌락 자체에서 자생 한 유구한 복지 관행(福祉 慣行) 때문이었다.
그 몇 가지를 열거해 보자. 복곡(福穀)이라는 것도 그 하나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 몫으로 일정량의 곡식을 내어 이곡(利穀)을 놓는다.
이 이곡으로 마을의 빈자나 행려병자나 노약, 병악자에게 베풀면 그 아이가 베푼 만큼 복을 받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마당쓸이'라는 아름다운 관행도 있었다. 당장 끓일 양식이 떨어지면 마당빗자루 하나 들고 이른 새벽에 부잣집을 찾아간다. 찾아가서 청하지도 않은 마당을 깨끗이 쓸어놓 고 돌아온다. 주인이 일어나 누가 마당쓸이를 했는가 확인하여 머슴으로 하여금 그 집
식구 며칠 먹을 양식을 퍼다 준다. 이로써 인정이나 의리, 정신적 부채는 질 망정 변 제할 의무는 지질 않는다.
안사람들의 `서덤'이라는 관행도 그것이다. 마님들이 밥지을 쌀을 퍼낼때 식구수에 세 사람 몫을 덧붙여 밥을 짓게 하는 것이 웬만큼 먹고사는 집의 법도였다. 덤으로 지 은 세 그릇 밥은 누가 먹건 가져가 먹건 그 마을의 어려운 사람이 먹게끔 돼 있었던 것이다.
`산나물서리'라 하여 보릿고개를 맞으면 산촌의 여인이 산나물 한 광주리 캐어 머리에 이고 잘사는 집을 찾아가 뒤란에 부려놓고 필요한 간장, 된장, 고추장 등 부식을 임 의로 퍼오는 약탈성의 복지 관행도 있었다. 마을에서 추렴을 하여 돼지를 잡으면 살코
기만을 나누어 갖고 내장일랑 그 마을의 노약, 병약자나 과부, 고아들에게 나누어줌으 로써 영세민에게도 고기 맛을 보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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