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및 남북국시대의 고승으로 고려시대에 성인으로 추앙되고 있었던 이는 여러 명이다. 그러나 종파와 상관없이 두루 존숭된 이는 오직 원효였는데, 법상종?화엄종?천태종 등에서는 자기 종파의 학문적 기초를 열었던 이로 그를 지목할 정도였다.
원효에게는 보살, 성사 등의 존칭이 부여되고, 그의 학덕에 필적할 이는 마명馬鳴과 용수龍樹 뿐이며, 그의 뜻은 불의佛意에 계합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가 태어난 불등을 마을을 불지촌佛地村으로 고쳐 부르고, 그 곳의 밤나무를 사라수로 명명했던 것은 그의 출생을 석존의 탄생에 비견한 까닭이었고, 이와 관련한 설화가 유포되었던 것은 이같은 인식의 대중적인 확산에 기인한 것이었다. 원효에 대한 이같은 인식은 고려인의 문화적 자긍심으로 확산되기도 했는데, 송과 요까지 원효의 저술을 유포시킨 의천이 “원효에 앞서는 선철先哲은 없다”고 했던 경우나 “신라 고승들의 조소홍경造疏弘經이 용수나 마명에 못하지 않았다”고 했던 천책의 자부는 그 구체적 예다.
원효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과 더불어 원효교학까지도 심층적으로 연구되고, 계승?발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화엄종과 법상종 등 교종이 주도하고 있던 고려전기 불교계에서 원효교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는 가능했지만, 이를 심화시킬 학문적 역량은 부족했다. 화엄종과 법상종으로 나뉘어 있던 당시의 불교계로서는 성상융회적性相融會的이고, 화쟁적和諍的이며 통불교적通佛敎的 성격이 강했던 원효교학의 전체를 이해하고 이를 종합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다. 의천의 경우, 원효교학의 독창성과 세계성을 이해했지만, 이를 심화시키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선종이 주도하고 있던 고려후기 불교계에서 원효교학이 계승?발전이란 기대하기 어려웠다. 지눌, 요세, 보환 등이 원효의 저술이나 게송을 극히 단편적으로 인용하는 데 그친 점과 원효 저술의 간행과 유통이 부진했던 것은 당시 불교계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원효의 유법을 계승?천명하기 위한 해동종 혹은 분황종이 13세기경에 성립되어 있었음은 주목되지만, 이 경우에도 원효의 교학을 계승하기보다는 원효의 무애행이나 대중교화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술을 즐겨 마셨다는 분황종의 광천光闡이나 원효의 무애행을 중시했던 종령수좌宗聆首座 이인로李仁老의 경우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14세기경부터 분황종에 대한 기록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도 지속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탓일 것이다.
일연의 원효 이해와 관련하여,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는 철학자로서의 원효의 모습을 전연 간과하고 있으며, 반면 대중불교 운동가로서의 모습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는 견해가 있다(최병헌 1987 : 662). ≪삼국유사≫에서는 원효불기조를 비롯한 그 밖의 원효 관계 여러 기록을 볼 때, 학자로서의 모습에 비해 그의 대중교화와 관련된 서술이 더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연은 신앙적 대중적인 불교계의 입장에서 원효를 대중전도사, 대중불교 운동가로서 이해하고, 그러한 면에서 주로 그의 대중불교 운동에 관한 자료만을 수집하고 정리하였던 것이라는 주장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일연의 원효 이해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삼국유사≫가 갖고 있는 내용상의 특징이 감안되어야 하고, 특히 원효불기조가 종합적이고도 체계적인 원효전의 서술을 목표로 하지 않았던 점을 지나쳐서는 안된다. 일연은 향전에 기록된 한두 가지 특이한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하려 했는데, 이러한 그의 서술 방침은 원효 이해의 편향성에 기인했다기 보다는 기존 전기류에 서술된 내용의 중복을 피하려는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일연은 원효의 행장이나 ≪송고승전≫ 중 원효전의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송고승전≫에 전하는 ≪금강삼매경론≫ 연기설화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고 자신의 해석까지 덧붙여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바다 용의 권유에 따라 길에서 조서를 받아 삼매경의 소를 지으면서 붓과 벼루를 소의 뿔 위에 놓아두었으므로 이를 각승角乘이라고 했는데, 또한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숨은 뜻을 나타낸 것이다. 대안법사大安法師가 배열하여 종이를 붙인 것은 음音을 알고 화창和唱한 것이다.
원효와 관련이 있는 사찰이나 유적지에는 그의 소상이나 진영이 봉안되기도 했고, 설화가 전해지기도 했다. 그 설화들은 대부분 원효의 능력을 크게 윤색했다. 그가 머물자 돌틈에서 샘물이 솟았다는 원요방설화, 그가 ≪법화경≫을 강의함에 맨 땅에서 연꽃이 피어났다는 백련사설화, 관음의 화신인 여인과 희롱했다는 냉천 및 관음송설화, 그리고 ≪삼국유사≫에 전하는 원효 관련의 여러 설화가 원효의 위대성을 강조하고 있다. 원효가 보살이나 성인으로 추앙될 수 있었음은 고금의 오류를 바로 잡았다고 평가되는 그의 학문적 성과와 대중교화로 전개된 실천행에 있었다. 그러나 원효교학에 대한 이해가 빈곤해진 고려 후기로부터 원효의 무애행은 더욱 설화화적으로 윤색되었다.
김상현 1994 <고려시대의 원효 인식> ≪정신문화연구≫17-1(5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출처 : 고리아이 역사공부방 : Clio of Corean
글쓴이 : 고리아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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