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란이 일어나자 무벌귀족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도망쳐 살아남았다 해도 경제적인 기반이나 사회적인 특권을잃었으니 살아가기가 막막했다. 다른 생업을 개척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어서, 저주해 마지않는 무신정권 주위에 모여들어서과거를 보아 벼슬하기를 바랐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세속을 외면한다고 자처하는 데서 실패에 대한 보상을 찾는 사람 일곱이 중국의 죽림칠현을 본뜬 죽립고회를 연다고 했다. 산수나 찾아 즐기며 고결한 문학을 한다고 표방했다.무신의 우두머리들끼리 정권다툼을 치열하게 벌인 1184년 (명종 14년)무렵이다. 일곱 사람은 누구나 대단한 재능을 지니고서도 불우하게 지낸다고 한탄했는데, 재능을 입증하는 작품을 남긴 사람은 오세재. 임춘. 이인로이다.나이로 보면오세재가 좌장이라 할 수 있다. 이인로가 대변자 노릇을 했다. 불우한 사람의 표본은 임춘이다.
오세재는 생몰연대를 알 수 없다. 지위가 보장될 수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무신란을 겪고 일거에 몰락했다. 이인로가 <파한집>에서 한 말을 따르면, 송곳을 꽂을 만한 땅도 없고 밥 한 그릇도 이어갈 수 없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50세에 이르러서야 겨우 과거에 급제하고서 등용되지는 못했다. 외가인 경주에 머물다가 죽었다. 눈병이 났을 때 지었다고 <파한집>에 소개한 <병목>이 딱한 처지를 잘 나타내준다.
病目
吳世才
老與病相隨 늙음과 병이 서로 따르는데
窮年一布衣 해가 다하도록 포의의 신세로다.
玄花多掩映 현화는 밝음을 가리기 일쑤이고,
紫石少光輝 자석에는 영롱한 빛이 적도다.
怯照燈前字 등불에 비친 글자 보기 겁나고,
羞承雪後暉 눈 온 뒤에 빛을 대하기 부끄럽다.
待看金榜罷 기다렸다 금방이나 보고 난 뒤에,
閉目坐忘機 눈 감고 들어앉아 세상 일 잊으리라.
임춘 또한 생몰연대를 잘 알 수 없으나, 생애가 잘 알려진 편이다. 무신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과거에 몇 번 실패했다. 음서로도 진출할 수 있었지만 자기 능력을 입증하고 떳떳하게 나아가려고 했다. 무신란이 닥쳐와 목숨을 구하려고 5년 동안이나 피해 다녔으며, 물려받은 토지를 다 빼앗기고 처량하게 되었다. 살 길이 막연해서 다시 개경에 나타났으나 무슨 해결책이 생길 수 없었다. 과거를 보아 벼슬을 얻으려고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30대에 요절했다고 한다. 아무리 처참하게 되어도 문학은 버리지 않으면서 삶의 보람을 찾고자 했다. <서회>라는 시에서 "詩人自古以詩窮 顧我爲詩亦未工"(시인은 예로부터 시 때문에 군공해진다고 하는데, 돌아보면 나는 시를 잘 짓지도 못한다)이라고 했다. 시는 가난한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고 하고, 잘 짓지도 못하는 시를 버리지 않아 가난을 자초한다고 했다.
평가받지 못하는 데 대해 계속 불만을 가지면서 문학관을 바꾸어놓았다. 성률에 구애된 시원치 않은 글만 대단하게 여겨 과거 급제의 영광을 갖다 안긴다고 비난하고, 자기 작품은 도를 구현하고 기에서 우러나왔으므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했다. 처지는 다르면서도 이규보와 상통하는 문학관을 표명하기 시작했으니 주목할 일이다. <공방전><국순전>같은 가전을 지은 것도 이규보와 함께 한 작업이다.
이인로는 벼슬길에 올라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으나 자기 처지를 만족스럽게 여기지는 않았다. 독자적인 문학론을 시화 형태로 전개해 <파한집>을 지었다. 문학이야말로 세상에서 어떻게 평가되든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했다. 인정받지 못해 불우하게 살아간 오세재, 임춘 같은 사람들을 옹호하고 칭송한 근거가 거기 있다.
표현을 공교롭게 다듬는 것이 문학의 가치를 발현하는 최상의 방안이라고 했다. 고전적인 표현의 전례를 충실하게 따르면서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애써 다듬어야 광채가 난다고 해서 문학이 삶의 실상을 여과 없이 그러낼 수 있는 길을 막았다. 형식의 아름다움을 견지해야 문학의 가치가 입증된다고 여겼다.
산문에서든 시에서든 용사를 소중하게 여겼다. 용사란 과거 명문의 표현이나 관련 사실을 재활용하느 창작방식이다. 용사를 통해서 문학의 고전적인규범과 가치를 재현할 수 있으며, 용사를 얼마나 능수 능란하게 구사하는가는 글 쓰는 사람의 능력을 측정하는 가장 좋은 척도라고 생각했다.
"제4 판 한국문학통사 2권". '죽립고회의 문학'. 조동일. 지식산업사. 2005. p.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