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율 있는 글/古展詩調

홍덕보 묘지명

눈자라기 2009. 6. 1. 18:46

덕보가 숨을 거둔 지 사흘째 되던 날 어떤 객이 북경으로 가는 사신을 따라 중국으로 떠났는데 그 가는 길이 삼하를 지나게 되어 있었다. 삼하에는 덕보의 벗이 있는데 이름은 손유의이고 호는 용주다. 3년 전 내가 북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용주를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해 편지를 남겨 덕보가 남쪽 땅에서 고을살이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자세히 전하고 아울러 우리나라의 토산품 두어 가지를 정표로 두고 온바 용주는 그 편지를 읽어 내가 덕보의 친구일 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떠나는 객에게 다음과 같은 부고를 용주에게 전하게 하였다.

 

건륭 계묘년 모월 모일에 조선의 박지원은 용주 족하께 머리 숙여 아뢰나이다. 우리나라의 전 영천 군수 남양 홍담헌 휘 대용, 자 덕보가 금년 10월 23일 유시에 운명하였나이다. 평소 병이 없었는데 갑자기 풍증이 생겨 입이 돌아가고 말을 못하더니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일이 닥쳤습니다. 향년 53세입니다. 고자 원은 곡을 하며 슬픔에 잠겨 있는지라 손수 글을 써 부고하지 못하나이다. 게다가 양자강 이남은 편지를 전할 길이 없사오니 바라옵건대 이쪽을 대신하여 오중에 부음을 전해 천하의 지기들이 그 운명한 일시를 알도록 해 주신다면 살아있는 분이든 돌아가신 분이든 여한이 없을 것이옵니다.

 

중국 가는 사람을 보내고 난 뒤 나는 항주 사람들이 덕보에게 보낸 서화며 서로 주고받은 편지와 시문이며 이런 것 열 권을 손수 찾아내어 빈소 옆에 벌여 놓고 관을 어루만지며 통곡하였다.

 

아아! 덕보는 통달하고 명민하고 겸손하고 고아했으며, 식견이 심원하고 아는 것이 정밀하였다. 특히 율력에 정통하여 그가 만든 혼천의 등 여러 기구들은 깊이 생각하고 오래 궁구하여 슬기를 발휘해 제작한 것이었다. 애초 서양인은 땅이 둥글다는 것만 말하고 회전한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덕보는 일찍이 지구가 한 번 돌면 하루가 된다고 논했는데 그 이론이 미묘하고 심오하였다. 그는 미처 이에 관한 책을 쓰지는 못했지만 만년에 이르러 지구가 회전한다는 사실을 더욱 자신하여 의심치 않았다. 덕보를 흠모하는 사람들조차도 그가 일찍부터 스스로 과거를 단념한 채 명리에의 생각을 끊고서 조용히 집에 들어앉아 좋은 향을 피우거나 거문고를 타며 지내는 것을 보고는 그가 담박하게 자중자애하면서 세속을 벗어나 마음을 닦고 있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래서 덕보가 백사를 두루 잘 다스리고, 문란하고 그릇된 일을 척결할 수 있으며, 나라의 재정을 맡기거나 먼 나라에 사신으로 보냄 직하며, 군대를 통솔해 나라를 방어하데 뛰어난 책략을 지녔다는 걸 통 알지 못했다. 하지만 덕보는 자신의 재주가 남에게 드러나는 걸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한두 고을의 수령으로 지낼 때에도 그저 관아의 장부를 잘 정리하고, 일을 미리미리 처리하며, 아전들을 공손하게 만들고, 백성들을 잘 따르게 함이 고작이었다.

 

덕보는 일찍이 서장관인 작은아버지를 수행하여 북경에 가 육비, 엄성, 반정균을 유리창에서 만났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집이 전당인데다 문장과 예술에 능한 선비였으며, 그 사귀는 이들도 모두 중국의 저명한 인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덕보를 대유로 떠받들며 심복하였다. 덕보는 그들과 수만 글자의 필담을 나눴는데, 그 내용은 경전의 취지며 하늘의 명이 사람에게 품부된 이치며 고금 출처의 도리를 분변한 것으로, 그 견해가 웅대하고 걸출하여 기쁘기 그지없었다. 급기야 그들은 헤어질 때 서로 마주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한번 헤어지면 천고에 다시 만나지 못할 테지요. 지하에서 만날 그날까지 부끄러운 일이 없도록 합시다.”

 

덕보는 특히 엄성과 마음이 맞았다. 그래서 군자는 때를 살펴 벼슬을 하기도 하고 벼슬을 않고 처사로 살아가기도 하는 법이라고 엄성에게 넌지시 일러 줬는데, 엄성은 크게 깨달아 그만 남쪽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뜻을 정하였다. 그로부터 두어 해 뒤 엄성은 민중에서 객사하였다. 반정균이 글을 써서 덕보에게 부음을 전하자 덕보는 애사를 짓고 향을 갖추어 용주에게 부쳤는데 그것이 전당에 전해진 그날 저녁이 마침 엄성의 대상날이었다. 서호 주변의 두어 고을에서 대상에 참예하러 왔던 사람들은 모두 경탄해 마지않으며 혼령이 감응한 결과라고들 하였다. djajtd의 형인 과가, 덕보가 보내온 향을 피운 뒤 그 애사를 읽고 초헌을 하였다.

 

 

엄성의 아들 앙이 덕보를 백부라 일컫는 편지를 써서 아버지의 글을 모은 ‘철교유집’을 덕보에게 부쳤는데, 이리저리 떠돈 지 9년 만에야 도착하였다. 그 책에는 엄성이 손수 그린 덕보의 작은 초상이 있었다. 엄성은 민에서 병이 위독한 중에도 덕보가 선물한 우리나라 먹을 꺼내어 그 향기를 맡다가 가슴에 올려놓은 채 운명하였다. 그래서 가족들은 그 먹을 관에 넣어 주었다. 오중에서는 이 일이 기이한 일로 널리 전파되었으며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시문을 지어 이 일을 기렸다. 주몬조라는 사람이 편지로 이러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

아아! 덕보는 생전에 이미 우뚝하여 옛사람의 기이한 자취와 같았으니, 훌륭한 덕성을 지닌 벗이 이 일을 널리 전해 그 이름이 한갓 강남에만 유포되는 데 그치지 않게 한다면 굳이 묘지명을 쓰지 않더라도 덕보의 이름은 불후가 되리라.

 

그 부친은 이름이 역인데 목사를 지내셨고, 조부는 이름이 용조인데 대사간을 지내셨으며, 증조부는 이름이 숙인데 참판을 지내셨다. 모친은 청풍 김씨이니, 군수 방의 따님이시다. 덕보는 영조 신해년(1731)에 태어났으며, 음보로 선공감 감역에 제수되었고, 곧 돈녕부 참봉으로 옮겼으며, 다시 세속익위사 시직에 제수되었다가 사헌부 감찰로 승진되고, 종친부 전부로 전임되었다가 태인 현감으로 나갔으며, 영천 군수로 승진하여 두어 해 재임하다 노모 봉양을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처는 한산 이홍중의 따님인데, 1남 3녀를 낳았다. 사위는 조우철, 민치겸, 유춘주이다. 돌아가신 그해 12월 8일에 청주 모좌의 땅에 장사지냈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하하 웃고, 덩실덩실 춤추고, 노래하고 환호할 일,

서호에서 이제 상봉하리니.

알괘라 그대는 스스로에게 부끄럼이 없었음을.

입에 반함을 하지 않은 건,

보리 읊조린 유자를 미워해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