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최대 불교사찰 황룡사의 치미
황룡사 치미
현재 터만 남아있는 경주 황룡사는 553년 20살의 젊은 왕 진흥왕이 착공한 뒤 선덕여왕이 645년 완성시킨 신라 최대의 사찰이다. 경주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돌담장의 길이만 동서 288m, 남북 284m로 전체 경내가 2만4천여평에 달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황룡사 9층 목탑은 80m, 금당의 주불인 장륙존상(丈六尊像)이 5m, 황룡사 대종(大鐘)도 49만근이 넘었을 정도다.
황룡사 절터에서 출토된 초대형 치미는 황룡사의 당시 위용을 짐작케 해준다. 치미란 지붕 꼭대기 용마루의 양끝을 장식하는 대형 특수기와. 복을 기원하고 액운을 쫓기위해 상상의 새인 봉황의 날개와 깃을 형상화했다.
황룡사 치미는 높이 182㎝, 너비가 105㎝로 동양 최대 규모의 치미로 기록돼 있다. 형체가 얼마나 큰 지 상하로 나누어 제작했을 정도다. 따로 나뉘었지만 둘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솜씨가 깃들어 있다.
황룡사 치미에 있는 얼굴조각상.
신라의 토우 문화와 일치하는 순박하고 해학적인 면을 담아내고 있다.
사부대중을 극락 정토로 인도하는 봉황의 날개는 금새라도 날개짓 할 듯 생동감있고 사실적이다. 층을 이루며 완만한 곡선으로 뻗어 올라가는 날개 깃은 체온마저 느껴진다.
치미의 양 측면과 봉황의 깃털 안쪽에는 손으로 빚어 만든 연꽃과 사람 얼굴 무늬가 새겨져 있다. 양측면에는 연꽃과 사람 얼굴이 번갈아 장식돼 있다.
신라 장인들은 사찰 바깥에서 보아 전혀 보이지 않는 깃털 안쪽면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바깥면보다 더욱 세심한 손놀림으로 정토를 구현하기 위한 불심을 정성스레 새겨 넣었다.
치미를 장식한 남녀인물상은 솜씨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욕심마저 스스로 엄격하게 잘라낸 장인의 얼굴모습 그대로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얼굴의 윤곽과 귀, 머리가 무슨 소용이랴. 칼로 세번 선을 그어 넣었을 뿐이다. 신라인의 예술은 하늘에 닿았던 것일까. 눈과 코, 입만으로도 그 미소가 그윽하다.
신라가 세상을 평정한 뒤여서 였을까. 통일신라기의 치미는 옛 신라기를 따라 오지 못한다. 장인의 혼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예 고려시대부터는 어룡(魚龍)이나 용머리 장식으로 바뀌면서 지상의 건축물을 천상으로 끌어 올리는 치미의 기품이 사라져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