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월 3일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가로 알려진 고조선(古朝鮮)이 건국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국경일로 제정된 개천절(開天節)이다. 우리는 중학교 및 고등학교 역사교과서를 통해 기원전 2333년(戊辰年)에 왕검(王儉) 단군(檀君)이 아사달(阿斯達)을 중심으로 고조선이라는 고대 왕국을 건국했다고 배웠다. 그리고 중국 은(殷) 왕국의 관리였던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망명했으며 주(周) 무왕(武王)에 의해 조선왕(朝鮮王)으로 책봉되어 고조선의 새로운 통치자로 군림했다는 이야기가 중국의 고서(古書)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또한 연왕(燕王) 노관(盧琯)의 부하인 위만(衛滿)이 기원전 194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고조선의 정권을 탈취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내용이 한국의 역사교과서에 버젓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행촌(杏村) 이암(李嵒, 1297~1364)의 단군세기(檀君世紀)에 의하면 위만(衛滿)은 고조선 전체를 장악한 제왕이 되지 못하였다. 기자(箕子)가 조선왕에 책봉되어 고조선을 다스렸다는 중국 고서의 기록도 사실이 아니다.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단군(壇君)은 인명(人名)이 아니라 왕호(王號)였다는 점도 알 수가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기원전 2333년에 탄생한 단군조선(檀君朝鮮)이라는 고대 왕국이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가라고 역사교과서를 통해 배웠지만, 삼성기(三聖紀)라는 문헌에 의하면 단군조선 이전에 신시(神市) 배달국(倍達國)이라는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우리 민족의 국조(國祖)는 고조선의 초대 단군(壇君)인 왕검(王儉)이 아니라 배달국의 첫번째 환웅(桓雄)인 거발환(居發桓)인 것이다.
기원전 3898년에 건국된 배달국은 1565년까지 존속하다가 열여덟번째 환웅인 거불단(居弗檀)이 단허국(檀墟國)의 임금인 왕검에게 양위함으로써 멸망하였고, 단웅(檀雄)과 웅국(熊國) 왕녀 사이에서 태어난 단허국의 비왕(裨王) 왕검이 제후국들간의 치열한 쟁패(爭覇)를 평정하고 기원전2333년에 조선(朝鮮)이란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 것이다.
이맥(李陌)의 태백일사(太白逸史)는 '마침내 신시(神市)를 대신하여 구역(九域)을 통일하고 관경(管境)을 삼한(三韓)으로 나누었으니, 이를 단군조선(檀君朝鮮)이라 한다.'라고 기록하면서 왕검 단군이 재위하는 동안 조선의 광대한 강역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 이를 삼한(三韓)이라 불렀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 삼한은 곧 진한(辰韓), 번한(番韓), 마한(馬韓)인 것이다. 현재 한국의 제도권 역사학계는 고조선이 멸망하고 난 뒤에 삼한이 성립한 것으로 보고 있고 그 위치는 한반도의 남단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는 삼한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에 불과했으며 그 본류는 중원대륙에 있었고 단군조선과 별개의 독립된 세력이 아니었다. 단군조선이 멸망하고 난 뒤에 후삼한(後三韓)이라는 정치집단이 별도로 생겼지만 이 역시 중원대륙에서 존재했던 것이다.
중국의 사서(史書)들은 삼한이 모두 78개의 속국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기록을 전하는데, 마한의 속국이 54개국, 진한과 번한이 각각 12개의 속국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훗날 백제와 신라도 삼한에 속한 일개 소국에 불과할 정도로 삼한조선(三韓朝鮮)의 강역은 매우 넓었다. 삼한조선 가운데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진한(辰韓)은 조선의 역대 단군(檀君)들이 직접 다스렸고, 나머지 번한(番韓)과 마한(馬韓)은 단군이 별도로 임명한 군왕(君王)에 의해 통치되었다. 각기 부르는 이름은 달랐지만 결국 조선의 광대한 영토를 셋으로 나눈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권한은 진한의 단군에게 있었으며, 번한과 마한은 일종의 제후국으로서 관할 자치국에 해당했다.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된 고조선은 제46대 단군 보을(普乙) 재위기인 기원전 284년 진개(秦開)가 이끄는 연나라 군대의 침공으로 2천여리의 서쪽 영토를 잃은 이후부터 쇠퇴하기 시작하더니 제47대 단군인 고열가(古列加) 재위기에 이르러 기원전 239년에 해모수(解募漱)가 웅심산(雄心山)에서 군사반란을 일으키자 이듬해에 고열가가 단군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서기 232년에는 해모수가 새로이 단군(檀君)의 제위에 올라 국호를 북부여(北夫餘)로 정함으로써 47대 2101년만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나라 사람인 기자(箕子)가 조선왕(朝鮮王)이 되었다는 기자조선설(箕子朝鮮說)을 과연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실로 공상소설 같은 이야기이다.
주(周)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왕으로 책봉했다는 기록은 후대에 왜곡·날조된 기사가 분명하다. 단군세기(檀君世紀)는 무왕이 은(殷)을 무너뜨리고 주(周)를 창건하자 나라를 잃은 왕족으로서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서화(西華)에 들어가 운둔생활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모든 정황으로 보아 이제 갓 새 나라를 세운 무왕이 기자를 막강한 조선의 후왕(侯王)으로 책봉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로, 결국 기자조선설은 후대에 조선이 쇠락하면서 중원의 세력이 커지자 당시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희망사항을 기록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무왕이 은나라의 폭군인 주왕(紂王)을 제거하고 주나라를 세울 때에 서경(書經), 사기(史記), 후한서(後漢書) 등에는 만이(蠻夷)·구이(九夷)·숙신(肅愼)·산융(山戎)·융적(戎狄) 등이 무왕을 원조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것은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입각한 의도적인 서술 방법으로 조선이라는 표현 대신 오랑캐·야만족으로 비하한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왜곡된 기록이다. 무왕이 고조선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은나라를 무너뜨렸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독자적으로 은나라의 폭군 주왕을 제거할 능력도 없어서 여러 동이족(東夷族)의 도움으로 거사(擧事)를 성사시켰던 주나라의 무왕이 도대체 무슨 힘이 있어 기자를 조선왕으로 책봉한다는 말인가?
서경(書經)은 누구나 알다시피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살았던 공자(孔子)가 저술한 책이고, 사기(史記)는 전한시대(前漢時代)에 사마천(司馬遷)이 편찬했다고 알려진 중국의 대표적인 정사(正史)이다. 이 두 문헌은 아무런 근거나 출전도 밝히지 않고 기자(箕子)가 조선왕이 되었다는 내용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공자가 생존했을 당시에는 단군조선이 건재하고 있었고, 사마천이 살았던 전한시대에는 단군조선의 삼한(三韓) 가운데 진한이 북부여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중원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번한도 엄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 문헌은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 가필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공자와 사마천이 직접 기록했다면 의도적인 곡필임에 분명하다.
사마천은 사기(史記)를 저술하면서 스스로 밝혔듯이 많은 부분에 걸쳐 공자가 편찬했다는 서경(書經)을 참고로 했다. 그런데 문제점은 주나라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사기의 주본기(周本紀)에는 기자를 조선왕에 책봉했다는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즉, 애당초 그러한 사실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며, 또한 참고로 하고 있는 서경의 원래 내용에도 그와 같은 기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기자조선(箕子朝鮮)이 실재했다면 왜 이러한 내용을 떳떳하게 주본기에 기록하지 못하고 엉뚱한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 기록해 놓는다는 말인가? 사마천은 도대체 무엇이 마음에 결려서 그러한 내용을 본기(本紀)에도, 심지어 조선전(朝鮮傳)에도 기록하지 못하고 송미자세가 한쪽 구석에 슬쩍 끼워 넣은 것인가? 그의 악의적인 곡필이 아니라면 필시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 왜곡되고 날조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사기는 많은 부분이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보충되었는데, 이름을 밝히고 사기의 내용을 보충한 사람은 저소손(楮少孫)과 사마정(司馬貞)뿐이다. 사기를 비롯한 중국의 고대 문헌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현재에 이른 것이지, 원래의 내용 그대로 전해 내려오는 문헌은 거의 없다. 특히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사서들은 더욱 그러하다. 이 때문에 중국은 위서(僞書) 왕국으로 소문난 나라이다. 허풍과 과장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중국인들에게는 오랜 전통이었던 것이다.
정말 이상한 점은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에서는 은나라의 왕족인 미자(微子)가 송왕(宋王)에 책봉된 사실에 대해서는 똑똑히 언급하고 있으면서 기자(箕子)를 조선왕(朝鮮王)에 책봉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사기 조선전(朝鮮傳)을 살펴보면 조선왕에 책봉되었다는 기자가 아닌 위만(衛滿)이 첫머리에 등장한다. 이것은 당시 막강한 국력을 자랑했던 조선의 실체를 숨기기 위한 속셈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다. 중국인들의 말대로 기자가 조선의 지배자로 군림한 것이 사실이라면 최소한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내용부터 서술을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의 내력이나 그 후손들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설명해야 마땅하거늘, 기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한나라를 배반하고 조선으로 도망친 위만부터 서술을 시작하고 있는 것은 결국 기자조선 자체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기에 사마천이 기록하고 싶어도 기록할 수가 없었기 때문인 것이다. 더구나 기자는 은나라의 3인(三仁)이라 하여 공자도 높이 평가한 인물인데 반해, 위만은 한나라를 배반하고 조선으로 도망친 반역무도한 죄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기자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위만에 대한 이야기만 실려 있으니 이를 어떻게 달리 설명할 수 있겠는가?
공자가 편찬한 서경(書經)과 시경(詩經), 춘추(春秋)와 역경(易經) 등도 대부분 철처한 중화사상을 확립하기 위해 쓴 문헌들이다. 사서삼경(四書三經) 혹은 사서오경(四書五經) 어디에도 조선(朝鮮)이라고 직접 언급하고 있는 부분은 없고, 대신 조선을 구이(九夷)·만이(蠻夷)·산융(山戎) 등의 폄하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헌들 중에서 유독 서경에서만 딱 한군데에 조선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바로 주나라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으로 책봉했다고 하는 그 부분이다. 모든 저술을 통틀어 조선이라는 국호를 한번도 사용하지 않던 공자가 갑자기 이 부분에서만 조선이라는 정식명칭을 쓴 것은 당사자의 의도적인 곡필이 아니라면 필시 후대의 악의적인 가필이다. 더욱이 기자가 실제로 조선왕에 책봉되었자면 당시 공자는 기자의 후손들이 조선을 다스리고 있는 상황을 직접 듣고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당연히 주나라와 춘추전국시대에 기자조선과 교류가 있었을 것인데, 당시의 문헌 어디에도 기자조선과 교류했다는 기록은 없다.
더욱 웃기는 것은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왕에 책봉하고 신하로 삼지 않았다.'는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의 기록이다. 무왕 자신이 기자를 조선왕으로 책봉했으면 당연히 주나라의 제후국이므로 무왕의 신하여야 마땅한데, 제후를 신하로 삼지 않았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기사다. 색은(索隱)에는 기자의 무덤이 양국(梁國)의 몽현(蒙縣)에 있다고 기록했는데, 몽현은 현재 하남성의 상구(商丘) 일대를 말한다. 기자의 무덤이 한반도 북부 지역이 아닌 중국 하남성에 있다는 것은 중국인 기자가 조선의 지배자로 군림했다는 중국 문헌의 기록이 모두 거짓임을 대변해주고 있다.
위만조선(衛滿朝鮮)이란 것도 삼한단군조선(三韓檀君朝鮮)의 일부인 번한조선(番韓朝鮮)에 망명한 위만(衛滿)이 기원전 194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수준왕(鬚準王)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여 생긴 불법적인 정권이지 조선 전체를 장악한 것은 아니다. 위만 정권이 성립될 당시에 단군조선을 계승한 북부여가 건재하고 있었으며, 북부여(北夫餘)의 네번째 단군 고우루(高于婁)는 중국인 망명 정권인 위만조선의 우거왕(右渠王)과 전쟁을 치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