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임금이 바뀔때마다 역사서술·평가 달라져
[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임금이 바뀔때마다 역사서술·평가 달라져
정도전의 '복권'을 금지하고 정몽주를 충신으로 높인 태종…
정당성 확보 못하면 왜곡으로
어느 시대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지만 조선시대는 특히 임금이 바뀔 때마다 역사적 서술과 평가가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개국과 함께 사필(史筆)을 쥔 쪽은 정도전(鄭道傳·1342~1398년)이었다. 그러나 태조7년에 일어난 이방원의 1차 왕자의 난으로 주살되자 조선건국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던 이색(李穡·1328~1396년) 계열의 인물들이 대거 복권되었다. 변계량·권근·하륜 등이 대표적이다.
태종 때 다시 시도된 '고려사' 편찬 작업은 하륜이 주도했고, 그래서 정도전이 쓰려 했던 '고려사'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조선 건국에 마지막까지 반대했던 정몽주(鄭夢周·1337~1392년)를 태종1년(1401년) 권근의 건의에 따라 영의정으로 추증한 것은 역사평가의 무상(無常)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정몽주를 주살했던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태종이 조선 건국을 한사코 반대했던 정몽주를 충신(忠臣)으로 높인 반면, 정도전은 개국공신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맞섰다는 이유로 태종이 영구히 복권시키지 말 것을 명했다. 이런 경우 대부분 시간이 흐르면 적당히 복권됐지만 정도전은 1865년(고종2년)에야 흥선대원군에 의해 겨우 복권됐다. 이방원에 의해 주살당한 지 거의 500년 만이었다.
'세조실록' 또한 수양대군이 조카를 내몰고 쿠데타로 세운 정권이 남긴 기록이기에 논란의 씨앗을 담고 있다. 수양과 한명회 등 승자 쪽의 시각이 일방적으로 녹아있을 것이라는 의구심 때문이다. '연산군일기'는 연산을 내쫓은 반정세력이 쓴 것이기에 역시 일방적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최근 왕권강화를 추진하다가 신권(臣權)을 중시한 신하들의 역모(逆謀)에 의해 억울하게 내쫓긴 임금으로서 연산을 재조명하려는 시각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명종(明宗) 때까지만 해도 조선 왕실은 우여곡절이 있긴 했어도 정비(正妃)소생인 적자(嫡子)들이 왕통을 이어왔다. 그러나 명종 때 적통이 끊기면서 처음으로 후궁의 손자인 선조(宣祖)가 추대형식으로 왕위에 오른다. 그 때문인지 신권이 강했고 당쟁(黨爭)이 시작됐다. 이런 싸움은 고스란히 실록 편찬과정에도 반영된다.
선조시대에 대해서는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이 있다. '선조실록'은 그것이 편찬되던 광해군 때 집권세력이었던 북인(北人)의 시각을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인(西人)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북인들이 내몰리면서 '선조실록'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작업에 들어가 효종8년 '선조수정실록'이 편찬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선조실록'을 파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대의 입장에서는 사건이나 인물의 양면성을 살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현종실록'도 훗날 개수작업을 거쳐 '현종개수실록'이 나오게 된다. '현종실록'은 숙종 초 권력을 잡았던 남인(南人)의 시각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경신환국으로 권력을 다시 잡은 서인세력에 의해 대대적인 수정 증보작업이 이뤄졌다. 과연 서인들이 역사를 왜곡한 것인지 재평가를 통해 사실(史實)을 바로잡은 것인지는 지금도 학계의 논쟁거리다.
'숙종실록'은 영조 초 노론(老論)이 주도해 편찬됐다. 그러나 얼마 후 소론(少論)이 득세하면서 수정 내지 개수를 시도하려 했지만 노론의 힘이 여전히 막강했기 때문에 극히 일부를 손대는 선에서 그쳤다. 그래서 이름도 '숙종보궐정오'다. 약간 보충하고 미미한 오류를 바로잡았다는 뜻이다. 아마 소론이 막강했다면 '숙종개수실록'이나 적어도 '숙종수정실록'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경종실록'이 그런 경우다. 영조 초 권력을 장악한 소론의 이집·조문명 등이 주도해 편찬을 완성한 것이 '경종실록'이다. 그러나 영조 중반 권력을 다시 쥔 노론은 오랜 준비를 거쳐 마침내 정조5년에 '경종수정실록'을 내게 된다. 특이하게도 수정의 범위가 가장 미미했던 '숙종보궐정오'를 제외한다면 역대로 수정·개수·수정 등의 작업을 추진한 세력이 다름 아닌 서인(西人)·노론(老論)이었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역사를 장악해야 당대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권력을 쥘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실제로 조선후기는 서인 노론의 시대였다.
역사는 당대 세력들의 투쟁 기록이면서 동시에 과거에 대한 당대 세력들의 기록 투쟁이기도 하다. 그러나 권력투쟁이나 역사투쟁 모두 승리 못지않게 정당성(혹은 정통성) 확보가 필수적임을 망각해서도 안 된다. 정당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승리는 무상(無常)하기 때문이다. 역사 왜곡과 재평가를 구별하는 척도도 정당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