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삼국유사 다시읽기 11 - 원효와 의상의 거리(距離)는 얼마쯤일까
삼국유사 다시읽기- 11
원효와 의상의 거리(距離)는 얼마쯤일까
헤르만 헷세의 작품에 《나르치스와 골트문트》라는 소설이 있다. 국내 번역은 ‘지(知)와 사랑’이라고 되기도 했는데, 내게는 이런 번역이 그다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자유스런 방랑의 예술가 골트문트와 근엄한 금욕주의 수도사 나르치스를 대비함으로써 생의 이원성, 인간의 두 가지 근본적인 존재방식을 다룬 작품이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육체와 정신, 감성과 이성, 혹은 쾌락주의와 금욕주의,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등등 가치의 양극성에 노출되어 고민하는 때가 있다. 이 두 가지는 정녕 이율배반적이요 서로 모순되는 것이어서 우리가 양자택일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들은 마땅히 통합되어야 온전한 하나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전인성(全人性)을 보장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삼국유사를 읽다가 원효와 의상, 이 두 거목을 대비하여 바라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사실은 그것이 본래 취사선택해야 하는 둘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는 두 가지 성향일 뿐일지라도 비교하는 과정에서 어떤 깨침을 얻을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스님이 어느 날 엉뚱하게도 거리에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그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지 않으려나?
그러면 나는 하늘 떠받칠 기둥을 찍을 텐데.
사람들이 아무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이 스님은 필경 귀부인을 얻어서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이때 요석궁에는 마침 과부 공주가 있었으니, 왕이 궁리에게 명하여 원효를 찾아 데려가라 했다. 궁리가 명령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니 그는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 다리를 지나고 있었다. 이때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궁리가 스님을 궁에 데리고 가서 옷을 말리고 그곳에서 쉬게 했다.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더니 설총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지혜롭고 민첩하여 경서와 역사에 널리 통달하니 신라 십현 중의 한 사람이다……원효는 이미 계를 잃고 총을 낳은 후로는 속인의 옷을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하였다. 그는 우연히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이하였다. 스님은 그 모양을 따라서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에서 말한 “일체의 무애인은 한 길로 죽고 사는 것을 벗어난다”는 문구에서 따서 이 박을 무애(無㝵)라 이름 짓고, 계속하여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평소에 이 도구를 가지고 수많은 마을에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교화하고 읊다가 돌아오곤 했다. 가난한 서민들도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하였으니 원효의 교화야말로 참으로 컸도다.(원효불기 항)
원효와 의상은 함께 보덕화상을 찾아가 열반경을 배웠고, 현장에게 유식학을 배우고자 당으로 가던 길에 요동에서 첩자로 몰려 함께 곤욕을 치렀고, 이어서 해로로 재차 동반 입당을 기도하는 등 8살의 나이차(원효가 연상)를 극복하고 참 가까이 지내던 도반이었다. 그러나 해로 입당 과정에서 두 사람의 인생행로는 영 틀어지고 만다. 오래된 무덤에서 해골 물을 마시고 깨쳤다는 원효, 그는 “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에는 있으며 당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는가?” 하고 더 이상 입당 유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자 곧바로 되돌아왔다. 이미 일체유심조의 이치를 알기에 그는 자발적 파계를 통해 요석공주와 설총을 낳았고, 파격적 교화에 나선다. 당대의 이승(異僧) 혜공, 대안 같은 승려들을 따라 그도 거리로 나아가 노래하고 춤추었다. 왕이나 귀족들의 비위나 맞추며 대접받는 승려가 아니라 장바닥이나 가난한 시골마을을 돌며 그들의 눈높이에 서서 불법을 전했다.
한편 의상은 끝내 유학하여 화엄종의 2조 지엄에게 배우고 스승을 능가하는 도를 이루었다. 그런 의상을 지극히 연모하던 선묘라는 중국 아가씨가 너무나 냉정한 의상에게 절망하여 바다에 투신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지금 부석사에는 그녀의 초상을 모신 선묘각이 있고 조사전 벽에도 선묘상이 붙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녀의 혼백을 위로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지계관(持戒觀)에서 의상과 원효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의상은 근엄한 수도승으로 몸가짐이 엄정했던 모양이다. 원효가 세속에 뛰어들어 개인교화를 하였다면 의상은 산속에서 교단을 만들어 제자를 양성했다. 원효는 제도권 밖에서 소외자를 위한 제도를 했고, 의상은 제도권 안에서 격식을 갖춘 교화를 한 것이다.
의상은 <화엄일승법계도> 정도가 주로 언급될 뿐으로 본격적인 저술 활동은 거의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원효는 만년을 주로 저술 활동에 바쳐서 경․율․론을 망라하여 100여 종 240여 권의 최고급 저술을 했다. 대신 의상은 표훈 등 이른바 대덕 10명을 비롯하여 통칭 3천 명의 제자를 길러냈지만 원효는 직계 제자가 별로 없다.
근엄한 수도사 나르치스는 골트문트를 사모했고, 자유분방한 예술가 골트문트는 나르치스를 사모했다. 어쩌면 의상은 원효, 그 무애도인의 하화중생(下化衆生) 방편을 부러워하고, 원효는 의상, 그 청정비구의 상구보리(上求菩提) 자세를 부러워하지 않았을까? 원효와 의상, 우열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본성이 아무리 통일적이라 해도 존재방식, 행동양식의 선택이 어차피 불가피하다면 고민은 깊어진다. 지금도 우리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보수와 진보, 강경과 온건, 좌와 우 등 특정 패거리에 소속되기를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
출처 : 원불교프랑크푸르트교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