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가락국기 (7월 1 - 2주 수업 분)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제2 〈가락국기(駕洛國記)> | ||||||
주석에 의하면 고려 문조왕 대강 연간(1075-1084)에 금관의 지주사가 찬한 것이라고 한다.
천지개벽 후에 이 땅에는 아직 나라로 부르는 칭호가 없고 임금이나 신하라고 부르는 칭호도 없었다. 여기에 있다는 것이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간이 있었으니 추장이 되어 백성들을 통솔하였으며, 호수는 무릇 1만 호에 7만 5000인이었다. 모두가 저마다 산과 들에 모여 살면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먹었다.
바로 후한의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42) 3월 계욕일( 浴日)1) 이 곳 북구지(北龜旨)2)에서 무엇을 부르는 수상한 소리가 나는데 형체는 감추고 소리만 내어 말하기를,
아홉 간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있습니다." 하니 또 말하기를,
하면서 춤을 추면 이것이 대왕을 마중하여 즐겨 뛰노는 것으로 될 것이다" 하였다.
아홉명의 간들은 그 말대로 모두 즐겨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얼마 안 되어 쳐다보니 다만 보랏빛 노끈이 하늘로부터 드리워 땅에 닿아 있었고 노끈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로 싼 금합(金盒)이 있었다. 그것을 열고 보매 둥글기가 해 같은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놀랍고도 기뻐서 함께 수없이 절을 하다가 조금 뒤에 다시 알을 싸가지고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와 탁자 위에 두고는 각각 흩어졌다.
그후 12일이 지난 다음 날샐 무렵에 무리들이 다시 함께 모여 합을 열었더니 알 여섯 개가 사내아이로 화하였는데 얼굴들이 매우 틀스러웠다. 이내 평상 위에 앉으니 무리들이 축하하는 절을 하고 정성을 다하여 공경하였다.
그들은 나날이 장성하여 10여 주야를 지났다. 키가 9척이매 은(殷)나라 천을(天乙)3)이라 할 수 있었고, 얼굴이 용 같으매 한나라 고조(高祖)라 할 수 있었고, 눈썹이 여덟 가지 빛깔이매 당나라 요(堯)임금과 같았고, 눈동자가 겹으로 되었으매 우(虞)나라 순(舜)임금과 같았다.
그달4) 보름에 왕위에 오르니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首露) 혹은 수릉(首陵)5) 이라고 하고, 나라를 대가락(大駕洛)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가야국(伽耶國)이라고도 일컬었으니, 즉 여섯 가야의 하나이다. 남은 다섯 사람은 각각 돌아가 다섯 가야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나라의 경계는 동쪽이 황산강(黃山江)이요, 서남쪽이 바다요, 서북쪽이 지리산(地理山)이요, 동북쪽이 가야산(伽耶山)이요, 남쪽은 나라 끝이 되었다. 왕이 임시 대궐을 짓게 하고 들었으나 다만 질박과 검소를 바랄 뿐으로 깊 어엉도 자르지 않고 흙으로 된 섬돌 층대가 3척 높이밖에 안 되었다.
1) 봄 가을로 물가에서 지내는 액막이 제삿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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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계묘 봄 정월에 왕이 말하기를, "짐이 서울 자리를 잡아야 하겠다." 하고 곧 임시로 지은 대궐 남쪽 신답평(新沓坪)6)으로 거동하여 사방의 산악을 바라보고 측근자들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이 땅이 여뀌 잎만하게 좁고 작지만 땅이 청수하고 범상치 않으니 16나한 부처님이 머물 만한 곳이다. 더군다나 하나에서 셋이 생기고 셋에서 일곱이 생기는 원리7)가 있는지라 일곱 분의 성인8)이 머물 만한 곳이 원래 여기인가 싶다. 강토를 개척한다면 나중은 참으로 좋겠구나!" 하고 주위 1500보 되는 외성[羅城]에 궁궐 전각과 일반 관사들이며 무기고9) 와 곡식 창고들의 자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