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Re: 한국의 고개를 찾아서 / 죽령
한국의 고개를 찾아서 / 죽령
- 비와 바람과 장승과 주막이 있는 풍경
영주시 풍기읍. 산읍(山邑)에 비가 내렸다. 벌써 사 나흘 전부터 온다고 설쳐대던 장마가 기어이 서막을 여는 모양이었다. 4백 리 한양길 죽령(해발 689m) 너머 기쁨의 도량 희방사와 인삼과 천하승지(天下勝地) 금계동을 품은 경상도의 첫 고을. 그리 번화하달 것도 없는 읍내 길을 물어 풍기 읍사무소에 들러 새로 펴냈다는 풍기읍지를 훑어보고 나오다가 문득 추로지향(鄒魯之鄕)이란 말이 생각나서 읍사무소 건너편 유림회관을 찾아갔다. 마침 소임을 맡은 서정학(77ㆍ 풍기향교 전교) 옹은 서울로 출타 중이고 평소에도 으레 그렇게 경로당을 삼는지 노인 서너 분이 모여 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죽령에 관한 걸 물었지만 들은 이야기는 모두 풍기읍지에서 대충 읽은 것들이다. 전화번호를 적어 나오는 길에 혹시나 해서 죽령의 관문시설이 있던 자리를 물어보니 역시 아는 이가 없었다.
2천년 역사 속의 옛길
풍기읍을 벗어나면 바투 소백산(해발 1440m)이다. 격암 남사고(南師古)가 그야말로 “사람이 살 만한 산”이라 하여 넙죽 절하고 갔다는 바로 그 소백산. 백두대간이 태백산 어름에서 문득 서해를 향해 말머리를 돌려 내륙으로 달리다가 한껏 가쁜 숨을 몰아 쉬는 곳이 바로 소백의 연봉들이다.
일찍이 영남 좌도의 크고 작은 고을들은 모두 그 소백산에 기대어 죽령으로 한양 길을 열었다. 신라 아달라왕 5년(158년)에 죽죽(642년 대야성에서 백제의 윤충에 게 죽은 죽죽과는 동명이인)이 처음 고갯길을 닦은 이래 오늘도 변함없이 길노릇에 여념이 없으니 고개 나이 무려 1천8백 살이 넘었다. 죽령은 한때 백제의 손길이 닿기도 했다 하고, 한때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땅이었다가 종당에는 진흥왕의 영토가 된 삼국 결사쟁패의 접경이었다. 또한 죽령과 조령 이남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고향이었으니 거기 가서 견훤의 흉을 보다가는 찬물 한 사발도 못 얻어 마신다. 고려시대를 지날 무렵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여 우왕 8년(1382년)과 9년에 각각 왜구가 죽령을 넘어왔다는 기록이 『고려사』 에 남았다. 임진왜란에 관한 이야기로는 인조대의 청백리 김시양(金時讓ㆍ 1581~1643)이 지은 『하담파적록』에 실린 다음의 대목이 그 중 흥미롭다.
동양위 신익성(申翊聖)은 상촌 신흠(申欽)의 아들이다. 글씨를 잘 쓰고 글을 잘 지어 문장으로 자허(自許)하였다. 신미년에 그의 아버지를 위해 (아버지의) 『상촌집』을 간행하여 배포하였다. 그 속의 『동정록』에, “임진년에 적이 조령, 죽령 두 재로부터 올라왔다.”고 하였다. (중략) 내가 동양위에게 말하기를, “임진 년에 왜적이 조령과 추풍령을 거쳐 올라왔고, 죽령만은 적의 발길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른 일이 없었는데 『동정록』에는 죽령으로 올라왔다고 말하였으며, (중략)” 하였더니 동양위는 얼굴빛이 변하여 돌아갔다. (『대동야승』 제72권)
희방사와 불경언해서 『월인석보』
풍기에서 죽령이 시작되는 곳은 수철리(水鐵里)다. 4.5km에 이르는 죽령 터널을 빠져 나온 중앙선이 희방사역에 닿아 잠시 벅찬 숨을 고르며 쉬었다 가는 곳이기도 하다. 수철리의 마을 이름 또한 희방사 연기설화에서 묻어 나왔다.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에 두운(杜雲)이란 스님이 살았다. 하루는 두운이 소백산 호랑이의 목구멍에 걸린 비녀를 뽑아주자 호랑이는 그 보답으로 젊고 아리따운 처녀 하나를 물어왔다. 처녀는 서라벌 계림호장 유석(兪碩)의 딸이었다. 출가승의 몸이라 처녀와 의남매의 인연을 맺은 두운이 유석에게 딸을 돌려보내자 유석은 두운을 위하여 절을 짓고 기쁨을 얻은 자리라 하여 희방사라 했다. 또한 산문 밖에 무쇠다리를 놓았으나 훗날 다리는 없어지고 수철리란 이름만 남았다 한다.
희방사역 부근에는 중앙고속도로 터널을 뚫는 공사가 한창이다. 첨단 시대의 토목 공사란 게 으레 산천은 안중에도 없는지 온통 소백의 팔과 다리를 잘라내 차마 목불인견이다. 소백산 깊은 골짜기 아름다운 희방사역은 이제 그 면목을 말끔히 잃었다. 마을로 내려서 볼까 하다가 왠지 슬픈 마음이 일어 그만 발길을 돌렸다.
얼마 전 비에 이미 큰물이 지났는지 죽령 구비마다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10리 남짓한 산구비를 하염없이 돌다 보면 희방계곡과 죽령길이 나뉘는 희방사 들머리에 닿는다. 희방사는 또한 『월인석보』로 유명한 절이다. 『월인석보』는 『 월인천강지곡』을 본문으로 삼고 『석보상절』을 주석으로 보태 세조 5년(1459년) 에 간행한, 훈민정음 이후 첫 불경언해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희방사판 『월인 석보』는 한국전쟁 무렵 미군에 의해 절과 함께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다.
죽지령(竹旨嶺)의 「모죽지랑가」
풍기 유림회관의 노인들은 한결같이 옛날 죽령에 김유신과 죽지랑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풍기읍지 역시 죽령에 죽지랑의 시비(詩 碑)를 세웠다고 적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도 좀체 아는 이가 없었다. 죽령 고갯마루와 아래 수철리를 두 번이나 오르내리면서 겨우 희방사 들머리에 있는 「모죽지랑가」 시비를 찾았다. 찾고 보니 뜻밖에도 여태 오르내리던 길섶 언 덕이었다. 안내판도 없고 또한 세운지 얼마 되지 않아 주민들도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죽지는 진덕여왕 대의 재상 술종(述宗)의 아들이다. 술종이 삭주(지금의 춘천)의 도독사로 부임하는 길에 죽령( 삼국유사에는 죽지령이다.)에서 한 거사(居士, 이 거사가 해동 고승 원측법사라는 설도 있다)를 만나 서로 정겹게 사귀고 헤어진 후, 삭주에서 꿈을 꾸었다. 죽령의 거사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꿈이었으니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다. 술종이 죽령에 사람을 보내 알아본 즉 거사가 죽은 날이 바로 꿈을 꾼 날이었다. 이에 술종은 거사가 자기 집에 환생하였음을 굳게 믿었다. 마침내 아들이 태어나 이름을 죽지라 불렀다.
효소왕 때 화랑 득오(得烏)는 향가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를 후세에 남겼다. 득오가 문관인 익선(益宣)에게 징발되어 고생할 적에 상관이었던 죽지를 그리며 지은 노래라 한다. 필자는 학교에서 공부할 적에 이 향가를 추모가라고 배웠는데 새로 책을 뒤적여보니 대부분 죽지 생전에 지은 향가라고 적혀 있다. 풍기 사람들 역시 죽지가 살아 있을 적에 이 고장 여인들이 부르던 노래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다고 한다.
가는 봄이 그리워
모든 것이 서러워 우네
아담한 얼굴에
주름살 지는 것을
잠시 사이나마
만나 뵙게 되었으면
님이여 그리운 마음으로 가시는 길
쑥대마을에 자고 갈 밤 있으실까
비안개 속의 장승, 그리고 주막
옛날부터 죽령길은 오르막 30리, 내리막 30리라 했다. 산길 60리는 잰 걸음으로 군일없이 걸어도 하룻길이다. 풍기에서 점심을 먹고 떠난 길이기도 했지만 길을 찾느라 시간을 많이 버린 탓에 고갯마루에 닿으니 이미 땅거미가 내렸다. 비는 오락가락하고 안개 속에 다들 어디로 갔는지 산 아래 두고 온 마을도 통 보이질 않는다. 여태 온 길도 갈 길도 그 저 묘연하기만 하다. 이런 저런 생각에 젖어 비 오는 죽령 고갯마루.
죽령 고갯마루는 충북과 경북이 서로 손 흔들고 헤어져 제 갈 길을 가는 곳이다. 문득 지난 일인 듯 홀연 산안개 걷히는 곳에 나무 장승 한 무리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샛길로 올라 금세 10여 기의 장승들이 버티고 선 마루턱에 닿았다. ‘소백대장부’와 ‘소백여장부’ 한 쌍이 무리의 우두머리인 듯 가운데 터를 잡고, 좌 우로 크고 작은 장승들이 고갯마루 오가는 행인들을 뚫어져라 쏘아보고 있다. 성 난 듯, 울부짖는 듯, 기어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그러면서도 슬쩍 웃음을 참는 장승 특유의 짓궂은 표정이 사뭇 싱그럽다. 소백대장부는 경북에서, 소백여장부는 충북에서 올라와 죽령 장승 부부가 되었단다.
장승에서 서너 행보 떨어진 곳에 일찌감치 사립에 붉은 등 내다 밝힌 초가 주막 한 채가 있었다. 이름하여 죽령 주막. 쪽빛 모시치마에 흰 저고리를 맵시 있게 차려입은 중년의 주모가 주살나게 문턱을 넘는다. 날은 저물고 그저 한 잔(?) 생각이 똥줄을 태웠지만 시절이 또한 시절인지라 어쩔 수 없는 일, 이빨을 악다물고 단양으로 핸들을 돌렸다.
이튿날, 주막집 채묵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안정자(43ㆍ 경북 영주) 씨는 영주서 횟집을 하다가 얼마 전 주막을 넘겨받았다고 했다. 물 좋고 바람 좋고 손님 좋은 것은 물론이고 벌이도 까짓 횟집에 댈 게 아니란다. 딸이 둘인데 하나는 중국에 공부하러 가고 하나는 대학엘 다닌다고 자랑이다. 팔자 좋아 산천 구경이나 다니는 사람하고 사진 한 장 찍자니까 금세 몸이 안 좋아 벗어두었다는 쪽빛 모시치마 를 차려입고 사립문에 선다. 벌써 그녀는 죽령의 냄새를 몸에 담은 모양이다.
폐허가 된 석굴사원 보국사지
채묵밥에 ‘싸비스’로 막걸리 한 사발 얻어 마셨으니 부러울 게 없다. 고갯마루에서 단양으로 떨어지는 30리 내리막길에는 골골마다 아직도 옛이야기처럼 주절주절 마을이 들어앉아 사람들이 산다. 샛골, 무시치, 매바우, 구렁말, 음지말 같은 그 이름마저 곰살가운 죽령의 터줏대감들. 옛길은 숲되고 숲은 새길 되고 또다시 새길이 옛길로 변하는 동안, 아직 거기 사는 이들 속내 변치 않아 오래 묵은 옛 마음 더러 남았으리.
고갯마루 아래 첫 마을은 샛골이다. 깊은 골짜기에 그저 없을 듯 없을 듯 걸려 있는 그림 같은 산촌이다. 대충 둘러보아 열 집은 넘고 스무 집이 채 안 된다. 논배미는 아예 찾는 일이 어리석은 듯싶고 밭도 하나같이 산비탈 화전 따비밭뿐이다. 마당에 소복이 가꾼 모종을 돌보는 한 노인에게 물으니 참두릅, 개량 머루, 사과 같은 고랭지 재배가 주업이란다. 본래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운 곳이지만 마땅히 농사 지을 땅이 없으니 그럴 것이었다. 요즘처럼 꽃 좋은 철에는 수입이 괜찮은 벌을 치는 이도 더러 있다고 했다.
샛골에는 케케묵은 절터가 하나 있다. 언젠가 죽령에도 중원 미륵사지처럼 거대한 석굴사원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어 무릎을 덮는 잡풀을 헤치고 골짜기를 거슬러 올랐다. 보국사지는 황량했다. 더러는 밭으로 쓰다가 오래 묵었고 더러는 수목에 묻혀 흔적을 잃었다. 다만 족히 두 길은 넘을 듯한 석불 입상 한 구가 외롭게 절터를 지키고 서 있는데 그나마도 머리가 떨어져나간 흉측한 몰골이다. 석불의 머리를 찾기 위해 온 산을 다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한다. 수없이 쇠망치를 맞은 듯한 발등의 상처로 보아 누군가 부러 몹쓸 짓을 저지른 모양이다. 짐작컨대, 아마도 전쟁의 짓이리라. 아, 이 땅의 미륵은 언제 오는가.
나랏님이 모시던 죽령 산신당
샛골에서 10리 남짓한 아랫말은 매바우(鷹岩) 마을이다. 면사무소 직원들은 아예 그런 마을 이름들을 뭉뚱그려 용부원리(用富院里:조선시대 용부원이 있었다)라 부르지만 아무려나 동네 사람들은 그래도 토종 옛 이름이 좋다. 매바우에 들러 산신당 얘기로 말문을 열자 모두들 김성락(79ㆍ농업) 옹을 가리킨 다. 김성락 옹은 죽령 산신제의 집사일을 맡은 지 어언 30년이 넘은 사람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렸는지 마당 한켠에서 고추를 다듬던 옹의 부인이 “에 구, 또 다자구 할망이지 뭐” 하면서 정감 어린 핀잔이다.
죽령의 산신은 ‘다자구 할머니’다. 단양문화원이 펴낸 『단양군 민속조사 보고 서(김영진ㆍ1992)』에 따르면 일찍이 신라시대부터 죽령에는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國行祭)가 있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봄가을로 나라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보내 작은 제사를 지낸다”고 죽령 밑에 주석을 달았다. 지금의 죽령사(竹嶺祠)를 짓고 산신제의 틀을 갖춘 것은 대략 조선 중기로 보이는데 이때 등장하는 산신이 바로 다자구 할머니다.
산적에게 두 아들을 잃은 한 노파가 있었다. 노파는 죽령의 산적을 잡는 데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던 토포군과 미리 짜고 산적굴에 들어갔다. ‘들자구야’는 기다리라는 신호였고 ‘다자구야’는 공격 신호였다. 산적에게는 이름이 ‘들자구’와 ‘다자구’인 두 아들을 찾는다고 둘러댄 터였다. 마침내 산적이 모두 술 취해 잠 든 사이 노파의 ‘다자구야’ 소리를 신호로 토포군이 들이닥쳐 산적을 섬멸했다. 이에 나라에서는 죽어 산신령이 된 ‘다자구 할머니’를 기려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소백은 다만 소백으로 산다 하고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이 땅의 모든 국행제를 금지시켰다. 죽령 산신제 역시 마을 사람들의 손에 의해 근근이 그 명맥을 이었다. 매바우에선 지금도 매년 음력 3월 과 9월이면 어김없이 산신제를 지낸다. 날짜는 초정(初丁)인데 초정에 부정(不淨) 이 들면 중정(仲丁)으로 넘겼다가 중정마저 부정이 들면 또 하정(下丁)으로 넘긴다. 도가(都家:제사 준비를 맡은 집)로 뽑힌 집주인은 목욕재계하고 3일 동안 기도를 올려 정성을 들인다. 매바우에선 마을 사람 누구라도 산신당에 대한 믿음은 가히 절대적이다.
산신당 가는 길에 앞장을 선 김성락 옹은 연방 한숨을 내쉬었다. 길도 하필이면 마을과 산신당 사이로 고속도로를 뚫어 그곳은 이미 비산비령(非山非嶺)의 참혹한 지경이 되어버렸다. 산마루까지 온통 민둥산이 되어 마치 가죽을 벗긴 짐승의 그것처럼 산천은 붉은 선혈을 떨구고 있었다. 죽령 북쪽 골짜기는 유독 심하여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을 감출 길이 없다.
죽령의 고갯길이 단양에 이르러 평지에 닿았다가 다시 슬쩍 솟구치는 곳이 남한강변의 적성산성이다. 국보 제198호 신라 적성비 또한 이곳에 있다. 마치 일부러 심술이라도 피운 듯 길은 그곳의 산마루까지 기어올라가 사정없이 산록을 벗겨냈다. 문득 멀리 돌아보니 그야말로 ‘사람이 살 만한 산’, 소백이 굽어보고 있다. 소백은 다만 소백으로 산다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