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이야기

[스크랩] 미추왕과 죽엽군

눈자라기 2008. 10. 25. 22:42

#三國遺事1卷-1紀異-未鄒王/竹葉軍-00

未鄒王. 竹葉軍.

 

#三國遺事1卷-1紀異-未鄒王/竹葉軍-01

第十三, 未鄒尼叱今[一作未祖, 又未古.], 金閼智七世孫, 赫世紫纓, 仍有聖德, 受禪于理{沾}解, 始登王位[今俗稱王之陵爲始祖堂, 蓋以金*<始{氏}>始登王位, 故後代金氏諸王, 皆以未鄒爲始祖, 宜矣.], 在位二十三年而崩, 陵在興輪寺東.

 

#三國遺事1卷-1紀異-未鄒王/竹葉軍-02

第十四儒理王代, 伊西國人, 來*<功,攻>金城, 我大擧防禦, 久不能抗. 忽有異兵來助, 皆珥竹葉, 與我軍幷力, 擊賊破之. 軍退後不知所歸, 但見竹葉積於*<米,未>鄒陵前, 乃知先王陰騭有功, 因呼竹現陵.

 

#三國遺事1卷-1紀異-未鄒王/竹葉軍-03

越三十七世, 惠恭王代, 大曆十四年己未四月, 忽有旋風, 從庾信公塚起, 中有一人乘駿馬, 如將軍儀狀, 亦有衣甲器仗者, 四十許人, *<隧,隨>從而來, 入於竹現陵, 俄而陵中似有振動哭泣聲, 或如告訴之音, 其言曰: “臣平生, 有輔時*<求,救>難匡合之功, 今爲魂魄, 鎭護邦國, *<禳,攘>災救患之心, 暫無*<倫,渝>改. 往者庚戌年, 臣之子孫, 無罪被誅, 君臣不念我之功烈, 臣欲遠移他所, 不復勞*<動,勤>, 願王允之.” 王答曰: “惟我與公, 不護此邦, 其如民庶何, 公復努力如前.” 三請三不許, 旋風乃還. 王聞之懼, 乃遣*<公,工>{大}臣金敬信, 就金公陵謝過焉, 爲公立功德寶田三十結于鷲仙寺, 以資冥福, 寺乃金公討平*<乎>壤後, 植福所置故也. 非未鄒之靈, 無以遏金公之怒, 王之護國, 不爲不大矣, 是以邦人懷德, 與三山同祀而不墜, 躋秩于五陵之上, 稱大廟云.

 

 

 

 

  제 13대 미추이질금은 김알지의 7세손이다. 대대로 벼슬이 높았고 여전히 성현의 덕이 있어 이해로부터 자리를 이어받아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지 23년 만에 죽었는데, 왕릉은 홍륜사 동쪽에 있다.

 

  제 14대 유리왕대에 이서국 사람들이 금성을 공격해 왔다. 우리(신라)는 대대적으로 (군대를)일으켜 막았으나 오랫동안 대항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귀에 댓잎을 꽂은 군대가 도우러 와서 우리 군대와 힘을 합쳐 적을 공격하여 무찔렀다. 군대가 물러간 후에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미추왕의 능 앞에 댓잎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는 그제서야 선왕이 음덕으로 도와 공을 세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능을 죽현릉이라 불렀다.

 

  그 후 37대 혜공왕 대인 대력 14년 기미년(779) 4월 김유신 공의 무덤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무덤 속에서 어떤 사람이 준마를 타고 나타났는데, 장군이 같은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또 갑옷 차림에 무기를 든 40여 명이 뒤를 따라와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능 안에서 무엇인가 진동하고 소리내어 우는 듯한 소리가 나고, 어떤 때는 호소하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그 말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신은 평생을 시대의 환란을 구하는 데 힘을 보태어 통일을 이룩한 공이 있고, 이제는 혼백이 되어서까지 나라르 지키고 재앙을 물리쳐 환란을 구하려는 마음을 잠시도 고쳐먹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술년(혜공와 6년)에는 신의 자손이 죄도 없이 죽임을 당했으니, 그것은 군주나 신하가 저의 공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입니다. 신은 이제 다른 곳으로 멀리 떠나 다시는 (나라를 위해) 힘써 일하려 하지 않으니, 왕께서는 허락해 주십시오."

 

미추왕이 대답하였다.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공은 다시 예전처럼 힘써 노력해 주시오."

(김유신의)세 차례 부탁에 세 차례 다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회오리바람은 곧 돌아갔다.

 

혜공왕은 그 말을 듣고는 두려워 즉시 대신 김경신을 보내 김유신 공의 능에 가서 사과하고, 공덕보전 30결을 취숸사에 하사하여 명복을 빌게 하였다. 그 절은 김공이 평양을 토벌한 후에 복을 심기 위해 세운 절이었다. 미추왕의 혼이 아니었다면 김유신의 노여움을 막지 못했을 것이니, 나라를 지키는 마음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라 사람들이 그 덕을 기려 삼산과 함께 제사 지내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제사 차례를 오릉보다 위에 두고 대묘라 일컬었다고 한다.  

출처 : 賢雲齋 현운재
글쓴이 : 성고운(3)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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