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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문화의 차이, 비유의 차이

눈자라기 2008. 10. 25. 22:29
문화의 차이, 비유의 차이


성경을 읽다 보면 비유가 무척 낯설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마르코 복음의 말씀은 새 술을 헌 부대에 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알 수가 없다. 막걸리 마시던 사람들이 새 포도주의 활발한 발효 작용이 가죽으로 만든 헌 부대를 팽창시켜 터뜨릴 정도라는 사실을 알 까닭이 없지 않은가. 더욱이 술은 단지나 술통에 담지 왜 가죽 부대에 담나. 유목민들의 이동 생활을 모르면 이 또한 이해가 쉽지 않다. 
마태 복음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나 가라지의 비유도 그렇다. 건조한 토양 위에 씨앗을 뿌려도 사막의 바람은 이리저리 씨앗을 불어 엉뚱한 곳에 떨군다. 밭고랑을 매서 씨앗을 뿌려 심고, 부지런히 김매서 거두는 우리 농사의 방식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빵이 주식이었으므로 누룩이 자주 비유에 등장한다. 포도주가 주 음료였던지라 걸핏하면 포도주의 얘기가 나온다. 포도원 일꾼의 품삯과 소작인의 비유 등 포도밭과 관련된 이야기도 유난히 많다. 그들의 일상에서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피부에 와 닿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나 낙타와 바늘 구멍의 비유도 그들의 유목 문화를 이해해야 제대로 된 의미를 알 수 있다. 신랑을 기다리던 열 처녀의 이야기는 그네들의 결혼 관습을 모르고서는 자칫 이상한 이야기로 비치기 쉽다. 비둘기나 나귀, 백합과 무화과 나무 등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들의 생활 가까이에 이것들이 비교적 흔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말하면, 저들은 무슨 말인가 갸웃한다. 농경사회에서 소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이해해야 비로소 실감나는 비유가 된다. 잘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는 말도 이쪽에서나 통하는 이야기다. 저들이 양과 목자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개나 소 닭을 이야기 한다. 건국 신화의 주인공도 로마 사람들은 늑대가 기르고, 우리는 김수로나 김알지, 박혁거세 할 것 없이 다 알을 까고 나온다. 유목 문화와 농경 문화의 차이다.
저들이 장미나 백합에 열광할 때 우리는 매화와 국화를 찬미한다. 미당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는 서양 독자들에게는 아무리 설명해도 요령부득인 작품이다. 그들에게 국화는 오상고절(傲霜孤節)의 상징이 아니라 장례식 때 쓰는 꽃이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도 울었나보다.”라고 하면, 아마도 저 여자가 자살을 준비하고 있나보다 하는 생각부터 할 것이다. 감동을 공유할 수가 없다.
서양화 속에 등장하는 쥐는 악마의 상징이다. 하지만 신사임당은 수박을 파먹는 쥐 그림을 그렸다. 이때 쥐는 한 배에 십 여 마리씩 새끼를 까는 다산을 상징한다. 결혼해서 자식 많이 낳아 다복하게 살라는 축복을 징그러운 쥐 두 마리를 그려 표현했다. 메뚜기는 곡식을 갉아먹는 악의 세력을 나타내지만, 동양화 속에서는 여전히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다. 한꺼번에 알을 많이 낳기 때문이다. 서양 사람들에게 사과는 으레 낙원 동산의 선악과를 떠올리고, 동양에서 복숭아는 장수의 심볼이다. 비유의 코드가 애초에 같지 않은 것이다. 
안식년으로 미국 동부에 1년을 살 때도 도대체 숲만 있고 산이랄 것이 없는 지형이 돌아 올 때까지 낯설었다.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나서면 전체 시야의 4분의 3 이상은 늘 하늘이었다. 저절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유럽의 들판을 보아도 그랬다. 헤르만 헤세가 왜 그토록 구름을 사랑했는지 절로 이해가 갔다. 프랑스에 가서는 인상파 화가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그 많은 풍경과 표정들이 눈앞에 그대로 펼쳐지는 것에 놀랐다. 우리에게는 이국적 정서를 일깨우는 풍경들이 그들에게는 눈 앞의 일상 그 자체였다. 그러니 그 그림을 보면서 느끼는 정서도 서로 아주 다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사람의 시는 왜 그렇게 계절에 집착하고, 꽃을 많이 노래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서양 학자를 만난 적이 있다. 사계절의 표징이 너무도 뚜렷한 우리의 기후 특성이 계절마다 삶의 양태를 어떻게 바꿔 놓는지를 몰라서 한 말이다. 예전 대만에 교환교수로 머물 때는 사철 푸른 숲 때문에 낙엽 없는 가을이 얼마나 어이없는 지 처음 알았다. 더욱이 추운 겨울을 지나 봄이 오는 길목에서 연둣빛으로 물오르는 봄 숲의 감동을 저 더운 나라 사람들이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가옥 구조처럼 충실하게 기후를 반영하는 것도 없다. 지붕의 경사 각도만 봐도 겨울에 눈이 많이 오는 곳인지 아닌지를 금세 알 수가 있다. 농경 지역의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집어 먹고 손바닥으로 떠먹던 기억을 젓가락과 숟가락으로 재현해냈다. 유목민들은 고기를 먹어야 하니까 칼로 썰어 포크로 찍어 먹었다. 이 도구의 차이가 또 얼마나 많은 사고의 차이와 비유들을 만들어냈을 지 생각해보면 벌써부터 아득해진다. 
모든 문화의 차이는 결국 기후와 풍토의 차이에서 나온다. 문화의 차이가 비유의 차이를 낳고, 인식의 틀과 삶의 양태를 바꿔 놓는다. 따라서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과정은 비유를 이해하는 일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글을 읽다가 이런 비유의 차이에 대한 설명이 좀더 친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서로 다른 코드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것이다. 
  
출처 : 賢雲齋 현운재
글쓴이 : 성고운(3)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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