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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내린 여왕 베스.

눈자라기 2007. 11. 22. 17:02

 

신이내린 여왕 베스 (재위 1558~1603)

 

 

엘리자베스는 지난 천년간 가장 뛰어났던 지도자라고 평가를 받고 있다.

 


16세기까지 영국은 스페인과 프랑스에 눌려 유럽의 작은 섬나라뿐이었는데 엘리자베스 1세는 그런 영국이 유럽 제1의 국가로 도약 할 수 있도록 초석을 닦은 사람이다. 스페인과의 싸움에서 영국은 뜻밖의 승리를 거두었고 이 후 엘리자베스 1세 치세에 영국은 과거에 잃은 대륙에서의 발언권을 되찾고, 국내로느는 외회제도를 통한 국민합의를 도출할 수 있었기때문에 영국의 국제적 지위는 크게 향상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예리한 지성, 확고한 의지, 여성다운 매력으로 백성에게 인기있는 왕이 되었다. 여왕은 정책수행에 헌신적 노력을 기울였고, 훌륭한 자문관들을 두고 우아한 궁중생활문화를 통해 예술을 후원하였다. 정치적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종교에 대해서도 관용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리하여 엘리자베스 1세는 당시 가장 존경 받는 여왕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프랑스. 스웨덴. 네덜란드 등과의 국제관계에서 무적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영국해군의 우수성을 내외에 과시하였다.

국내에서 가톨릭 부흥운동을 근절하기 위해 1587년 스코틀랜드의 매리 여왕을 처형하였다. 귀족들은 군부와 정부에서 더이상 우월적 지위를 누리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 하원은 상원보다 더 큰 정치적 권한을 행사하였다.

 

엘리자베스는 정치적으로 가장 훌륭한 여왕이었지만 개인사적으로는 불운한 여인이었다.
헨리 8세는 앤 볼레인에게서 아들을 얻고 싶어 본처인 스페인 공주 캐서린과 이혼을 하였고 그 여파로 로마 교황은 헬리 8세를 파문하고 영국은 로마 카톨릭에서 분리하여 국교회를 성립하였다. 결국에 앤 볼레인이 낳은 것은 딸 하나, 엘리자베스 공부 뿐이었고 모든 무리를 감수하고 앤에게 왕비의 왕관을 씌워줬던 헨리 8세의 불타는 애정은 아들이 아닌 딸이 태어난 순간 그대로 식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앤 볼레인을 간통죄로 몰아 왕비가 된지 3년만에 되끼로 목을 내려쳐서 죽여버렸다. 그리고 3살 난 딸 엘리자베스는 아버지가 앤과의 결혼을 무효라고 선언함에 따라 서출이 되었다. 이때 부터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목숨은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을 하였다. 배다른 언니 메리 공주와 또 배다른 동생 에드워드 왕자 사이에서 그녀는 불행하고 조심스러운 청소년기를 보내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에드워드 6세는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하였고, 같은 서출로 공표 되었던 언니 메리가 그 왕권을 차지 하게 된다. 열렬한 구교 신봉자였던 메리의 등극은 엘리자베스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을 암시하였고, 아버지 아래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영국 국교회의 신자가 되었던 엘리자베스는 다시 한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메리 여왕 앞에서 구교로 개종할 것을 엄숙히 다짐하였다. 이 다짐으로 인해 엘리자베스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런던탑에 유페되었다. 메리 여왕은 이미 국교가 뿌리내리기 시작한 영국을 다시 구교국가로 만들기 위해서 국교들에게 대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시작 하였다. 그래서 그녀의 통치기에 너무나 ㅁ낳은 사람들이 죽어 bloody mary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이런 과격한 메리 여왕도 사랑했던 스페인 국왕 필리페 2세와 결혼에 실패한 후 앓다가 사망하였따. 마침내 비운과 불운을 다 짊어지고 살아 온 듯한 엘리자베스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메리여왕의 공포 정치로 숨죽이며 살아왔던 국민들은 영국 혈통에, 국교도인 엘리자베스의 여왕 즉위를 환영 하였다. 그러나 구교 귀족  세력들은 엘리자베스 보다는 헨리 7세의 적손이면서 프랑스의 왕비였고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던 메리 스튜어트를 지지하였다. 메리 스튜어트 또한 자신의 문장에 잉글랜드의 왕관을 그려놓았다. 이것은 엘리자베스는 자격없는 왕이며 사실은 자신이 잉글랜드 왕이라는 것을 공표한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이 사건으로 크게 자존심에 상처를 입게 되었다. 태어나면서부터 혈통적으로 고귀하고 당당했던 메리 스튜어트에게 서출이며 자격없는 왕이라고 놀림을 받은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를 용서할 수 없었다. 이 후 두 여인의 일생을 건 시기와 질투는 결국 엘리자베스가 메리를 단두대로 보냄으로서 종결 되었다.

 

 

국민들과 신하들은 엘리자베스 1세에게 결혼을 권유하였지만 그녀는 이를 번번히 뿌리쳤다. 그러면서 그녀는 늘 자신은 국가와 결혼을 했다고 선언을 하였다. 다만 엘리자베스는 스스로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인정하고 불같은 사랑속에 세번 결혼하고 왕자를 낳은 메리 스튜어트를 진정으로 부러워 했다고 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여러명의 애인을 두었으나 결코 권력을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단속하였다. 행여나 애인 중에서 권력욕이 지나친 사람은 어김없이 런던탑에 유폐하거나 단두대로 보내었다. 엘리자베스는 국가와 결혼했다고 스스로 선언한 것에 걸맞게 영국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Good Queen Beth라는 칭호를 당대에 들었다. 엘리자베스 1세 당대에 영국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유럽의 해상권을 제패하였으며, 신대륙으로 길을 열었다. 국교회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안정과 의회의 안정 등을 꾀하여 국내 상황을 호전 시켰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많은 문호들이 등장하여 영국문화의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여인으로서 우여곡절 많고 불행한 삶이 었지만 이를 불안하고 괴팍한 정치운용으로 풀어 내지 않고 끊임 없는 자기 성찰과 조심성으로 걸러내 국가를 가장 부강하게 만든 여왕 엘리자베스 1세 그녀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내면을 강철같은 냉정으로 포장하고 개인의 삶보다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살아갔다. 그녀가 있었기에 대영제국이 있었고 더불어 유럽전체가 함께 성장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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